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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수정(雙樹亭). 쌍수정 사적비. 공산성(公山城). 공주시(公州市) 본문
쌍수정(雙樹亭). 공산성(公山城). 공주시(公州市). 충남(忠南)
공산성 쌍수정 (公山城 雙樹亭)
문화재 자료 제 49호
1734년 (영조 10) 에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인조는 이괄의 반란 (1624)을 피하여 공주로 피난을 와 6일간 공산성에 머물렀는데, 인조는 이곳에 서있던 두 그루의 나무(雙樹)밑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인조는 자신이 기대고 있었던 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리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공산성을 "쌍수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三架亭)을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 안내문에서 -
쌍수정 사적비
유형문화재 제 35호
인조가 이괄의 난 (1624)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비문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 있다. 1708년 (숙종 34)에 세웠으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 안내문에서 -
인절미의 고장 공주
인절미는 찹쌀을 시루에 익힌 다음 그것을 절구에 찧어 조그맣고 네모지게 잘라 콩고물을 무쳐 먹는 떡이다. 그런데, 왜 인절미라 불렀을까 ?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1624년 잠시 공주에 피난 온 적이 있었다.
피난 중에 우성면 목천리 근처 임씨 댁에서 콩고물에 무친 떡을 진상하였다.
왕은 시장한 참에 연거푸 몇개를 먹더니,
"맛이 있구나. 그런데, 떡은 떡인 모양인데, 대체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으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떡 이름이 있을 텐데 아무도 모르니, 그것 참 기이한 일이오. 근데 이 떡은 어느댁에서 만들어 왔소?"
"임씨 댁에서 만들어 진상했습니다." 왕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임씨라,,, 임씨라... 그것 참 맛이 절미(絶味)로다." 그리하여, 임씨가 진상했다하여 이때부터 임절미(任絶味)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임절미"는 발음하기 편하게 "인절미"로 바뀌고, 공주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 "공주떡"이 되었다.
- 안내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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