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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관. 융건릉(隆健陵). 화성시(華城市) 본문
역사문화관. 융건릉(隆健陵). 화성시(華城市). 경기도(京畿道)
왕의 효심이 담긴 조선왕릉
융릉. 건릉 隆陵. 健陵
세계유산 융릉. 건릉 隆陵. 健陵
사적 제 206호
융릉(隆陵)은 왕으로 추존된 장조(사도세자, 장헌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능이며, 건릉(健陵)은 장조와 헌경왕후의 아들이자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다.
장조는 조선 제 21대 왕인 영조의 둘째 아들로 어린 나이에 왕세자가 되었으나 영조와의 갈등으로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조는 조선 제 22대 왕으로 영조의 치적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의 제도를 완성하였다. 특히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쟁을 약화시키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헌을 집대성 하였으며,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복위에 노력을 기울였다.
장조와 정조 가계도
사도장헌세자
현륭원
장조와 헌경왕후 융릉
장조는 조선 제 21대 왕인 영조의 아들이자 제 22대 왕인 정조의 아버지이다. 장조는 1735년에 태어나서 일찍이 왕위를 이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44년에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와 혼례를 올리고, 1749년부터 정계에 관여하였지만 1762년 뒤주에 갇혀 돌아가셨다.
장조는 1762년 돌아가셨을 때 영조에 의하여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불리었다가, 1776년 정조가 즉위한 후 '장헌세자(莊獻世子)'가 되었고, 1899년 고종에 의하여 '장조(莊祖)'로 추존 되었다. 그에 따라서 무덤의 이름도 변모하였다.
혜경궁 홍씨로 잘 알려져 있는 헌경왕후는 장조가 죽은 후 <한중록(恨中錄)>을 저술하여 남편이 죽게 된 과정을 궁중 문학으로 남겼다. 헌경왕후는 1815년에 돌아가셔서 융릉에 합장되었다.
사도세자 수은묘 思悼世子 垂恩墓
1762년(영조 38)에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와의 갈등으로 인하여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다. 영조는 세자가 죽은 후에 '사도(思悼)'라는 이름을 내렸고, 사도세자의 묘지명을 직접 작성하여 세자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 지역에 조성하였다.
사도세자의 무덤 이름을 정확히 정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사도세자의 사당 이름인 '수은묘(垂恩廟)'가 무덤 이름처럼 사용되어 '수은묘(垂恩墓)'로 불리게 되었다.
장헌세자 현륭원 莊獻世子 顯隆園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 제 22대왕으로 즉위하자 사도세자의 지위도 확립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올리면서, 무덤이름도 '수은묘'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올렸다.
1789년에 장헌세자 영우원을 현 지역인 경기도 화성시로 천장하면서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고치고, 병풍석과 무석인 등 석물을 재조성하였다.
무덤 이름인 '현륭원'은 '낳아주고 길러주신 현부(顯父)에게 융승하게 보답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 정조의 효심을 확인 할 수 있다.
장조 융릉 莊祖 隆陵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언한 지 2년이 지난 1899년에 '장헌세자'를 왕을 일컫는 '장조(莊祖)'로 올리고, '현륭원'을 '융릉(隆陵)'으로 높여 능으로 대우를 다하였다.
이듬해인 1900년에 고종이 장조 융릉에 표석(비석)을 추가로 세웠는데, 이 때 표석 글씨는 고종이 직접 썼다. 따라서 현재 융릉 비각 안에는 1789년에 세운 현륭원 표석과 1900년에 세운 융릉 표서, 총 2기의 표석이 있다.
융릉의 이름은 수은묘, 영우원, 현륭원을 거쳐 현재 융릉으로 불리게 되는데 융릉은 조선왕릉 가운데 능(陵), 원(園), 묘(墓)라는 명칭을 모두 거친 유일한 능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
Record of the Royal Visit to the Tomb of Crown Prince Sado in Hwaseong Province
1795년에 정조가 아버지인 장조(사도세자)와 어머니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이하여 궁궐을 떠나 융릉(현륭원)과 수원화성에 행차하는 과정을 그린 그림이다.
화성 행행도
1795년(정조 19) 을묘년의 원행 행사를 8폭의 병풍에 담은 기록화이다.
화성성묘전배도 華城聖廟展拜圖
화성 안의 공자를 모신 사당에 참배하는 모습이다. 산으로 에워싼 건물 안에 정조의 자리가 보이며 건물 바깥으로 삼엄하게 경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조 효의황후
건릉(健陵)
정조와 효의왕후 건릉
정조는 조선 제 22대 왕으로 영조의 손자이다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왕세손으로 책봉 되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는 비운을 겪었다.
정조는 1776년에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여 자신의 정통성이 사도세자에게 있음을 밝혔다. 이후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하고,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 정치을 펼쳤으며, 신도시인 수원화성(華城)을 건립하였다. 1800년에 정조가 돌아가셔서 정조의 무덤 건릉이 아버지 무덤인 융릉 근처에 조성되었다.
효의왕후는 시어머니인 헌경왕후를 정성껏 모셨고, 1821년에 돌아가셨다. 효의왕후의 무덤을 조성할 때 기존에 조성된 정조 건릉을 지금의 위치로 이장한 후 합장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정조와 효의왕후 생애
1752년
정조가 장조(사도세자, 장헌세자)와 헌경황후(혜경궁 홍씨)의 아들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남
1759년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
1762년
왕세손 정조와 세손빈(효의왕후)이 가례를 올림.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쳐 돌아가심
서울시 휘경동 지역에 사도세자 수은묘 조성
1775년
왕위를 이어가기 위한 대리청정
효손 정조
1776년 영조는 손자인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찾아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효성 깊은 손자라는 뜻으로 '효손(孝孫)'이라는 글자를 새긴 은인을 정조에게 내려준다. 영조는 은인과 함께 손자에게 이르는글을 남기고,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해동 300년의 우리 조선은
83세의 임금이 25세의 손자에게 의지한다.
듣건대 어제 손자가 사도세자 무덤에서 했던 행동은
사람들의 옷깃을 눈물로 적실 만하였다...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체득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의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1776년
왕실 도서를 수집, 연구하는 규장각(奎章閣)을 설립
규장각은 후에 정조의 왕권을 뒷받침하는 연구기관으로 성장
1782년
강화도에 외규장각 완성
외규장각에는 왕과 비의 어보를 비롯하여, 왕이 쓴 글과 의궤 등을 보관
1785년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여러 법령을 통합하여 편찬한 통일 대전 <대전통편(大典通編)>을 널리 반포
1785년 10월 정조는 영조의 첫 번째 비인 정성왕후 홍릉(弘陵)에 표석을 설치하고, 같은 해 11월에 큰아버지인 진종 영릉(永陵)에 정조가 직접 쓴 표석을 설치
1789년
서울에 위치한 사도세자 영우원을 현 지역으로 옮기고, 무덤 이름을 현륭원(후에 융릉으로 고침)으로 높이며 원을 조성
1790년
실무에 필요한 전투기술을 다룬 훈련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완성
1796년
정약용의 거중기 등을 이용하여 수원 화성 완성
영조 원릉에 새긴 정조의 글씨
정조는 1776년에 할아버지인 영조가 돌아가시자 원릉를 조성하였다.
영조 원릉은 1758년 (영조 34)에 완성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내용을 충실히 구현하였으며, 원릉 비각에는 영조의 손자인 정조(正祖)가 직접 쓴 표석(表石)이 남아 있다.
정조의 발인과 건릉의 구성
조선 22대 왕인 정조가 창경궁에서 승하하여 아버지가 계시는 융릉(현륭원) 오른쪽 지역에 정조 건릉을 조성
1821년
정조의 비 효의왕후가 돌아가시자 정조 건릉을 현 위치로 옮기고 합장하여 건릉을 조성
조선왕릉 분포도
조선왕릉 공간구성
1. 곡장(曲墻) : 봉분의 동. 서. 남. 북에 둘러 놓은 담장
2. 봉분(封墳) : 왕릉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
3. 병풍석(屛風石) :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 아래에 둘러놓은 돌
4. 난간석(欄干石) : 봉분을 둘러싼 울타리 돌
5. 석양(石羊) : 왕릉을 지키는 양 모양의 석물
6. 석호(石虎) : 왕릉을 지키는 호랑의 모양의 석물
7. 망주석(望柱石) : 봉분 좌우에 세우는 돌기둥
8. 혼유석(魂遊石) : 석상(石牀)이라고도 하며 왕의 혼이 노니는 곳
9. 장명등(長明燈) : 어두운 사후 세계를 밝힌다는 의미를 지닌 석등
10. 문석인(文石人) : 왕을 보좌하는 문인을 상징하는 석물
11. 무석인(武石人) : 왕을 호위하는 무인을 상징하는 석물
12. 석마(石馬) : 문석인과 무석인의 뒤나 옆에 배치하는 말 모양의 석물
13. 예감(瘞坎) : 산릉제례 때 사용한 축문을 태우는 곳
14. 산신석(山神石) : 왕릉이 위치한 산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곳
15. 정자각(丁字閣) : 산릉제례 때 제사를 지내는 건물
16. 비각(碑閣) :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17. 수복방(守僕房) : 왕릉 관리자가 머무는 건물
18. 수라간(水刺間) : 산릉제례 때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
19. 신도(神道). 어도(御道) : 신도는 돌아가신 왕의 혼령이 다니는 길.
어도는 제사를 드리는 왕이 다니는 길.
20. 판위(板位) : 왕이 능역에 들어서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하는 공간
21. 홍살문(紅箭門) :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붉으 기둥의 문
22. 금천교(禁川橋) :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돌다리
23. 재실(齋室) : 왕릉 관리자가 상주하며 산릉제례에 필요한 제수를 준비하는 곳.
조선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 석실(석실)로 조성한 조선 왕릉
조선전기 왕실의례서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록된 조선왕릉의 조성 과정이다.
<국조오례의>에는 두 명을 안장하는 합장릉(합장릉) 형식의 석실구조가 기록되어
있으며 15세기 전반까지 왕릉 내부는 돌로 만든 방인 석실로 조성하였다.
2. 회격(회격)으로 조성한 조선왕릉
조선후기 상장례 과정을 정리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1758)에 기록된
조선왕릉의 조성과정이다. 영조의 명으로 편찬된 이 책에는 왕릉의 내부 구조를
현재의 시멘트와 비슷한 회격으로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원화성과 용주사
수원화성은 1796년 정조가 당시 과학적 기술로 만든 신도시로, 수원화성 내부에는 왕이 행차할 때 머물수 있는 행궁이 있고, 바깥으로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수원화성의 축조방법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상세하게 실려 있으며, 풍부한 기록유산과 과학적 조성 방법을 인정받아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 융릉(당시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1790년에 근교에 있는 용주사를 중건하어 무덤을 지키는 사찰로 정하였다. 용주사에는 부모님의 은혜를 기린다는 내용의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등 정조 시대의 유물이 다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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