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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 寧陵) 안내. 여주시(驪州市) 본문
영릉(英. 寧陵) 안내. 여주시(驪州市). 경기도(京畿道)
세계유산 조선 왕릉 사적 195호
영릉(英陵. 세종대왕). 영릉(寧陵. 효종대왕)
문화재청. 세종대왕 유적관리소
영릉(英陵). 영릉(寧陵)
영릉(英陵)
조선 제 4대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제 3대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18년 6월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된 뒤 같은 해 8월 11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32년 동안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설치, 6진 개척, 쓰시마 섬 정벌, 측우기 제작 등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전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로 1408년 (태종 8)에 충녕대군(세종)과 가례를 올렸다. 세종과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어 조선 왕비 가운데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비로 손꼽히며 궁궐 안주인의 소임을 훌륭히 수행하여 후궁들의 질투가 없었다고 전한다.
영릉(寧陵)
조선 제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은 제 16대 인조의 둘째 아들로 병자호란이 끝난 뒤 1637년 (인조 15)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가 8년간 머물렀다. 귀국 후 1645년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인조 27)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고,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등 병자호란 이후 민생의 안정과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북벌정책을 추진하였다.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는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이다. 병자호란 후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있을 때 현종을 낳았으며 귀국한 뒤 1649년(인조 27)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 ①~⑤ 영릉 영릉 관람 포인트
연혁
세종영릉(英陵)
1446년 소헌왕후 승하. 헌릉(태종의 능)의 서쪽 산줄기에 조성
1450년 세종 승하, 소헌왕후와 합장
1469년(예종 1) 여주로 천장
효종영릉(寧陵)
1659년 효종 승하, 건원릉(태조의 능) 서쪽 산줄기에 조성
1673년(현종 14) 여주로 천장. 영릉 조성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 안장. 동원상하릉 조성
제향일
● 세종 : 4월 8일 (양) ● 소헌왕후 : 4월 28일 (양) ● 효종과 인선왕후 : 6월 23일 (양)
세종 영릉 관람 포인트
1. 신계 옆의 동계가 신계의 좌우에 두 개가 설치되어 있다
세종 영릉의 정자각 동편으로는 신계 좌우에 동계가 두 개 설치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2. 동봉이실합장릉으로 조영되어 있다.
세종영릉은 하나의 봉분 아래에 왕과 왕비 두 분의 현궁(광)을 마련한 동봉이실의 합장릉이다. 이는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능을 바라 보았을 때 좌측이 세종, 우측이 소헌왕후의 현궁이 마련되어 있다)
효종 영릉 관람포인트
3. 금천교가 참도 중간에 조영되어 있다.
조선왕릉의 금천교가 홍살문에 이르기 전에 금천을 건널 수 있도록 조영된 것과 달리 효종영릉의 금천교는 참도 중간에 조성되어 있다.
4. 동원상하릉의 능제를 보여준다.
효종 영릉은 하나의 산줄기에 상하로 봉분을 배치한 동원상하를의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위쪽에는 효종릉이, 아래쪽에는 인선왕후릉이 조영되어 있다.
5. 보물 제 1532호 재실과 천연기념물 제 459호 회양목
대부분의 조선왕릉 재실이 멸실되거나 원형이 훼손되어 있는 상황에서 영릉 재실은 그 옛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회양목은 보통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이지만 영릉 재실의 회양목은 보기 드문 큰 노거수로 그 생물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매우 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 과 비
애민이 낳은 열정, 정열이 키운 자신감과 단호함 (세종)
스승의 날 5월 15일은 세종대왕의 탄생일이다. 한글을 쓰는 모든 사람은 세종의 제자라 할 수 있으니 참으로 탁월한 택일이다. 한글은 세종이 '친히', 주도적으로, 비밀리에 창제한 우리글로서 세종의 천재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자 상징이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훈민정음 한글) 28자를 지었는데.... (중략) ...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세종실록 25년(1443) 12월 30일
그러나 훈민정음이 당시 식자층에게 문자로 인정받고 널리 쓰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1444년 2월, 창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훈민정음은 당시 조선의 핵심 두뇌집단이었던 집현전 학자들과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훈민정음의 과학성은 인정하나 '백성들의 교화에 훈민정음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즉 훈민정음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세종은 신하들의 문제제기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이는 세종의 모습은 매우 단호하다. 당시의 실록 기사를 통해 훈민정음에 대한 세종의 자신감과 애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언문(훈민정음)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子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세종) 그 운서을 바로 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세종실록 26년(1444) 2월 20일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에 세종은 추상과 같이 매섭게 하명하였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세종실록 26년 (1444) 2월 20일
그리고 나서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등을 의금부에 하옥했다.
세종은 이튿날 이들을 석방하였지만 처음에는 훈민정음 창제가 좋다고 하다가 나중에 말을 바꾼 김문은 의금부에서 그 죄를 조사하여 보고케 하고 장(杖) 100대을 명한 후, 돈으로 이를 대신하도록 했다.
세종은 인자한 품성과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였지만, 자신이 키운 집현전의 학자들을 하옥시킨 모습에서 한글 창제에 대한 그의 애착이 어떠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부터 공식화까지 세종은 여러 방법과 노력으로 훈민정음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였고, 비로소 한글을 쓰는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정치적 견해가 달랐던 형 소현세자에 대한 의리 (효종)
익선관
오직 자신의 마음을 극진히 하고 자신이 할 일을 삼가면서 항상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어간다'는 탄식을 하였다. 또 탄식하며 이르기를,
"옛날에 '마음을 같이 하는 신하가 한둘만 되어도 도움이 된다.' 했는데 지금은 너나없이 덩달아 눈앞의 이익만을 꾀하고 있으니, 나와 함께 일을 할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효종대왕 묘지문 (효종실록 수록)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효종의 묘지문에서 의리의 군주 효종을 위와 같이 회상했다.
효종이 진정 '마음을 같이 하는 신하 한둘과 함께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북벌(北伐)이었을 것이다. 북벌(北伐)은 인조의 정치적 후계자였던 효종이 힘들지만 가야한 했던 외길이었다. 왜냐하면, 아버지 인조와 형 소현세자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당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림)의 치욕을 씻는 길은 오직 북벌(北伐)이기 때문이었다.
영릉(세종) 진입로의 소나무
소현세자는 생각이 좀 달랐다. 굴욕적일지 모르지만, 효종보다 개방적이고 전향적이었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청의 모습을 보며 신문물을 적극 수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소현세자는 8년동안 심양에 있으면서 아담 샬 (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과 같은 인사와 교류했고, 서구의 신문물과 그것의 통로가 되었던 청나라에 호의적이었다. 나중 효종의 뜻과 완전히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에 대한 효종의 의리와 둘의 관계는 살갑고 끈끈했다. 효종실록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심양의 볼모시절 효종은) 소현세자와 같은 관사(館舍)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형제 사이의 정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므로...... 화기애애하여 사람들이 이간할 수 없었다.
효종대왕 행장
효종 스스로 생사고락을 같이한 소현세자와의 애틋한 관계를 회상하기도 했다.
"내가 소현세자와 동시에 북행(北行)하여 험난한 이역 땅에서 어렵고 위험한 지경을 모두 겪었는데 늘 좌우에서 이끌어 주면서 주야로 떠난 적이 없었다."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소현세자에 대한 효종의 의리는 계속되었다. 북벌의 의지를 천명하고 오직 그것에 전념하였던 터라, 죽은 소현세자와 죄인이 된 형수 강빈과 조카들에 대한 효종의 호의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던 때이다.
"소현과 함께 험난한 이역 땅에서 눈서리를 맞으면서도 좌우로 서로 이끌어주면서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람의 일이 속절없이 저렇게 되었으니 항상 슬픈 마음으로 그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그의 자식들을 나의 자식과 달리 본다면 죽은 이의 입장에서 어찌 유감이 없겠는가." 하였다. ... 효릉(孝陵)에 행행할 때 소현세자의 묘가 그 곁에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나의 지난번 꿈에, 소현이 나를 보고서 살았을 때처럼 반겼는데 지금의 꿈에는 나의 손을 잡고 슬퍼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는 슬픔 감회를 형용하기 어려웠다." 하고는, 마침내 능에 참배한 뒤 그의 묘를 살피고 돌아왔다. 효종대왕 묘지문
효종 영릉의 사초지와 석물 인선왕후릉의 석호와 효종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을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崇慕)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문종의 현릉
조선왕릉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王)과 왕비(王妃)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인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조선왕릉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다.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능기신제(陵忌晨祭, 기일에 올리는 제사)의 전통을 이어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숙하게 행해진다.
조선 왕릉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세종의 영릉
2.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
문정왕후의 태릉 정자각
3.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
효종의 영릉 재실
조선왕릉 주요 상설(象設)
조선왕릉에는 각 공간적 성격에 부합하는 건축물과 조형물이 왕릉의 전체적인 조경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되어 있다.
- 재실(齋室) :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 금천교(禁川橋) : 왕릉의 금천을 건너는 다리로서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한다.
- 홍살문(紅箭門) :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다. 홍문(紅門) 또는 홍전문(紅箭門) 이라고도 함.
- 참도(參道) :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 박석을 깔아 놓았으며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신도(神道)라고 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御道) 라고 한다.
- 비각(碑閣) : 비석이나 신도비를 세워 둔 곳. 신도비(神道碑)는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가리킨다.
- 정자각(丁字閣) : 능 제향을 올리는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 무인석(武人石) : 문인석 아래에서 왕을 호위하고 있으며, 두 손으로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로 서 있다.
- 문인석(文人石) : 장명등의 좌우에 있으며,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서 있다.
- 능침(陵寢) : 능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 능상(陵上) 이라고도 한다.
- 곡장(曲墻) :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의 동, 서, 북 삼면에 둘러 놓은 담장
관람정보
⊙ 관람시간
봄/가을 (2-5월, 9-10월) : 09:00 ~ 18:00
여름 (6-8월) : 09:00 ~ 18:30
겨울 (11월-1월) : 09:00 ~ 17:30
* 매표는 1시간전에 마감합니다.
* 매주 월요일은 휴관합니다.
⊙ 관람요금
대상 |
개인 |
단체 (10인 이상) |
만 25세 - 64세 |
500원 |
400원 |
* 50% 할인 대상자
-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문화재 소재지의 기초자치단체주민 (여주시민)
* 무료 관람 대상자
- 만 24세 이하 (외국인 6세 이하), 만 65세 이상 (외국인 포함)
- 장애인, 국가 유공자 및 배우자, 병역명문가증 소지자
- 기초생활수급자 및 차상위계층
- 유치원 교사 및 초. 중. 고 교원 (학생인솔 등 교육활동 시)
⊙ 관람정보
문화유적 해설 사전 예약 (031) 887-2838
⊙ 교통
버스
- 버스 시간표 (세종대왕 ↔ 여주시내버스 노선)
출발장소 |
버스번호 |
출발시간 |
여주터미널 (Buy the way 편의점 앞 버스 승강장) |
961 |
09:30 |
965-1 |
13:10 | |
952-2 |
14:50 | |
세종대왕릉 |
961 |
10:00 |
965-1 |
14:20 | |
952-2 |
15:30 |
자가운전
- 서울 - 여주 (37번 국도) 42번 국도 여주 - 영릉 2.5 Km(5분)
⊙ 문의 :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주소 : (12642)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전화 : (031) 885-3123~4
홈페이지 : http://sejong.cha.go.kr
- 안내문에서 -
영릉 英陵 (세종. 소헌왕후릉)
조선 제 4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를 모신 합장릉(合葬陵)이다. 원래 세종대왕릉은 헌릉 서쪽(서울 내곡동)에 조성하였다가 1469년(예종 원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고 혼천의를 비롯한 여러 과학기기를 발명하는 등 재위기간 중 뛰어난 업적을 이룩하였다.
영릉 寧陵 (효종. 인선왕후릉)
조선 제 17대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장씨를 모신 쌍릉(雙陵)으로 위쪽이 효종대왕릉이다. 원래 효종대왕릉은 동구릉의 건원릉 서쪽(경기 구리시)에 있었으나 1673년 (현종 14년) 이곳으로 옮겼다. 재실은 현존하는 조선 왕릉 재실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보물 제 1532호(2007. 11. 29)로 지정되었고, 재실 내에는 천연기념물 제 459호(2005. 4. 30, 수령 300여년)로 지정된 '여주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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