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탈출...
다산문화관. 남양주시(南楊州市) 본문
다산문화관. 남양주시(南楊州市). 경기도(京畿道)
다산의 저술
2012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자 했으며(愛民), 지속 발전의 가치를 추구했던 정약용의 삶과 업적이 유네스코의 이념과 일치하는 바가 인정되어 기념 인물로 선정 !
장 자크 루소 탄생 300주년
Jean-Jacques Rousseau
1712. 6. 28 ~ 1778. 7. 2
프랑스, 계몽 사상가
헤르만 헤세 사망 50주기
Hermann Hesse
1877. 7. 2 ~ 1962. 8. 9
독일, 소설가. 시인
다산 정약용 탄생 250년
茶山 丁若鏞
1762. 6. 16 ~ 1836. 2. 22
대한민국, 실학 사상가
클로드 드뷔시 탄생 150주년
Claude Debussy
1862. 8. 22 ~ 1918. 3. 25
프랑스, 작곡가
다산길 길잡이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배움의 실현
다산은 1789년(정조 13),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규장각에서 정조의 지우를 받았다. 같은 해, 그는 한강에 배를 잇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주교<배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1792년(정조 16) 겨울, 정조의 특명으로 수원 화성의 설계에 참여하고, 지레와 도르레, 녹노의 원리 등을 연구하여 거중기를 만들었다. 이는 서학의 기술적 측면에 대한 다산의 깊은 이해와 연구를 보여주는 것이며, 군신이 합심하여 이룩한 실용적 성과물 이라고 할 수 있다.
1796년(정조 20), 다산은 규장각에서 박제가 등과 교유하며 북학파의 학문을 접하고 수용하여 실학을 회합하는 기반을 다졌다. <경세유표> 서문에서 부국강병을 도모하기 위해 이용감(利用監)의 개설과 북학(北學)을 배울 것 등을 주장하였다.
거중기
1792년, 부친상의 와중에도 화성 설계의 명을 받아 거중기(擧重機)를 설계하여 공사비 4만 냥을 절약하게 하였다.
주교(舟橋)<배다리>
배을 엮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설치한 다리이다.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의 융릉(융릉)으로 옮기고, 봄. 가을의 능행차 때 한강을 건너려고 1790년(정조 14)부터 용산에서 노량진까지 배다리를 설치하였다.
함복련 사건
1799년(정조 23), 다산은 형조참의가 되어 살인죄로 사형 판결을 받은 함복련 사건을 다시 조사하였다. 관리들이 법률서적을 읽지 않아 그 피해가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하였다.
이계심(李啓心)의 석방
1797년(정조 21), 전임 수령의 부정을 탄핵한 이계심(李啓心)이 부임하는 길목에 자수하였는데, 주위에서 포박하라고 권하였으나 다산은 진상을 공술 받고 격려, 석방하였다.
서용보(徐龍輔)의 탄핵
1794년(정조 18) 다산은 경기도 암행어사로 각 고을을 순찰하면서 당시 전반적인 제도의 모순, 관리들의 부패, 피폐한 민생을 직접 확인하였다. 특히 관찰사 서용보(徐龍輔)의 가인(家人)을 처벌하고 서용보의 비위를 탄핵하였다.
유배지에서 그리운 마현
그리운 고향 마현
다산과 형제들은 소천의 족자도, 남자주에서 가끔 솥을 걸고 함께 천렵을 즐겼다. 다산은 유배시절 몇 번의 실패를 걸쳐 자신의 고향 마현(馬峴)을 직접 그려 다산 초당에 걸어두고 그리워 했다. 그 고향은 친척과 형제, 아내와 자식, 그리고 이웃들이 함께 있던 곳이다.
다산은 유배시절 궁색한 삶 속에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중심으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여 방대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 속에는 천리나 떨어져 있지만 서로를 그리워하던 애틋한 부부의 정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멀리서 세상의 모든 일에 욕심을 버리고 학문의 실천을 당부했던 다산은 그들을 마음에 담고 500여 권의 저술을 지었을 것이다.
여유당(與猶堂)
여유당은 다산이 고향집에 건 당호(당호)이다. '여유'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 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랑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으로, 세상사와 자신에 대한 경계의 뜻이 담겨 있다.
하피첩(霞帔帖) 이야기
부인 홍씨는 결혼 30년 되는 1806년(순조 6)에, 살아서 다시 봇 볼 것 같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시를 짓고,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치마를 다산에게 보낸다.
다산은 부인의 시와 붉은 치마를 받고서, 비단 치마를 여러 폭으로 마름질하여 두 아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적어 보냇다. 이것이 하피첩(霞帔帖)이다.
그리고 1813년, 시집가는 딸에게, 하얀 꽃망울 가득한 매화가지 위에 두 마리 새가 정겹게 앉은 모습을 그리고 시도 지어 주었다. 두 마리 새는 부부의 화락을 상징하고, 풍성한 매화는 집안의 번창을 의미한 것이다. 시집가는 딸에게 귀양살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곡진하게 담아 보낸 걸작이다.
하피첩(霞帔帖)
하피첩(霞帔帖) 시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를 부쳐와,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 바랬네.
재단하여 작은 첩자 만들어,
아마도 이 부보 생각하고,
천리 떨어진 곳에서 깊은 마음 보냈구나.
슬프다. 그만큼 늙고 노쇠한 모습 떠올라
아이들에게 당부의 글 적는다.
종신토록 가슴 깊이 새기겠지.
하피첩에 전하는 아버지의 마음
"군자가 책을 지어 세상에 전하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의 알아줌을 구하여 온 세상 사람들의 성냄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나의 책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나이가 너희보다 많거든 아버지로 섬기고, 너희와 엇비슷하다면 형제로 맺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글은 다산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이다. 다산 자신의 저술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저서가 읽히고 안 읽히고의 문제는 곧 국가와 민생에 직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말한 '실학(實學)이 진정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노력과 열정을 다해 저술 활동을 전개한 다산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1803년, 농민들이 스스로 자신의 생식기를 자르는 비극적 사태가 일어났다. 황구첨정과 백골징포에 시달리다 못한 농부가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것이다. 조선 후기 농민들의 고충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인데, 다산은 이러한 참상을 보고 국가의 개혁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애절양(哀絶陽)
양경을 자른 것을 슬퍼하며
갈밭마을 젊은 아낙, 울음도 서러워라
동헌 향해 통곡하며 하늘에 울부짖네
전장의 남편이 못 돌아옴은 있을 법한 일이지만
예부터 남자 절양(絶陽) 들어보지 못했다네
시아버지 죽어 상복을 입었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三代)의 이름이 군적에 모두 실려 있다네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하려도 범 같은 문지기가 버티어 섰고
이정(이정)들이 호통치며 외양간의 소마저 끌고 갔네.
남편이 칼을 갈아 방 안으로 들어가자 붉은 피가 자리에 낭자하네
스스로 한탄하며 "아이 낳은 죄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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