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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茶山草堂). 강진군(康津郡) 본문

나라안 나들이/전라남도

다산초당(茶山草堂). 강진군(康津郡)

세계속으로 2011. 5. 8. 23:53

다산초당(茶山草堂). 강진군(康津郡). 전남(全南)

 

 

 

 

 

 

 

정다산 유적

Dasan Jeong Yak-yong's Residence in Exile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기간 (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 (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 (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초당에 오르면 다산초당에서 절대 빼놓을수 없는 보물인 다산 4경()이 있다. 고적한 유배생활의 정취가 서려있는 정석(石), 약천(), 다조(竈), 연지석가산()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다산실학이 구상되던 도량이요 산실이다.

초당에 이른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인 정호승은 이길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

 

 

 

 

 

 

뿌리의 길

정호승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 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오솔길

다산초당에는 다산의 정취가 묻어 있는 3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입구에서 초당에 이르는 '뿌리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동암을 지나 천일각 왼편으로 나 있는 '백련사 가는 길'이다. 윤종진의 묘 앞에 나 있는 이 '오솔길' 역시 다산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마을을 오가며 다녔던 길이다.

 

 

 

 

 

 

   

 

 

 

 

 

 

 

정 석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 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약 천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은 다산초당의 제 2경이다.

처음에는 물이 촉촉히 젖어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다 조

다산이 이 곳에 오기전부터 있던 이 돌은 차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던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 다산초당의 제 3경이다.

 

연지석가산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동 암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천일각과 백련사 가는 길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800여 미터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만날 수 있다.

 

 

 

 

 

 

 

백련사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