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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기포지. 고창군(高敞郡) 본문

나라안 나들이/전라북도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고창군(高敞郡)

세계속으로 2013. 5. 12. 16:57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고창군(高敞郡). 전북(全北)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함은 오로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의리는 인륜중의 자못 큰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아비에게 효도한 연후에 비로소 집과 나라를 이루어 무한한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럽고 백성에게 자애로우시며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시니 만약 아래로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 힘을 더하여 그 총명을 돕느다면 요순의 덕화와 한나라 문제경제의 치세를 가이 해를 보듯이 바랄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의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부질없이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해 차지하고 성상의 총명을 가리고 온갖 아부와 아양만을 일삼으며 충성되이 옳은말로 간하는 선비를 가리켜 요망한 말을 한다고 이를 물리치며 착하고 정직한 사람을 도리어 徒로 몰아 세운다 안으로는 나랏일을 보살필 재목이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괴롭히는 벼슬아치가 많아서 온백성의 마음이 날로 흐트러져 집에 들어서면 생업을 즐길 마음이 내키지 않고 나가도 한 몸을 지탱할 계책이 없다. 포악한 정치는 날로 더해 가고 원망하는 소리는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모두 무너지고 말았도다 管子가 말하기를 四維 즉 禮義廉恥 가 바로서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하고 만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형세는 오히려 옛날보다도 더욱 심하다 하겠다. 公卿이하 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자신을 살찌우는 것과 가문을 빛내는 데에만 급급하여 사람 선발하는 문을 돈벌이로 볼 뿐이며 응시의 장소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만들었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배만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과 더러운 일만을 거리낌없이 자행하니 8도는 어육이 되고 만인은 도탄에 빠졌다. 수재의 탐학에 백성이 어이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도 망하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밖으로는 향제를 설치하여 오로지 제 몸만을 취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 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토지를 부쳐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사니 어찌 국가의 존망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 8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경동하지 말고 각자 그 생업에 편안히 하여 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임금의 덕화를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이겠노라.

서기 1894년 3월 20일

호남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자(字) 명숙(明淑). 호 해몽(蒙) 관(貫)천안

천안전씨 족보에 의하면 이름이 철로인데 봉준은 아명인듯 하며 체구가 작고 야무져 녹두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고창읍 당촌리에서 출생하여 13세무렵까지 살다 전주 구미리, 정읍 산외면 동곡리, 그리고 이평면 양교리에서 다시 고개넘어 조소리로 이사 하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소장을 올릴때에는 아버지 전창혁이 먼저 김도삼 정일서등과 3장두로 나섰으나 전창혁이 심한 매를 맞아 장독으로 죽은뒤에 전봉준등이 고부봉기를 주도하여 2개월 이상 버터 왔으나 내부조직의 약화와 신임군수 박원명의 회유로 해산하기에 이른다. 이어 안핵사 이용대의 만행에 동지 수십인과 함께 무장의 손화중에게 숨어든다. 손화중과는 1892년 11월 삼례취회때부터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과 더불어 우리사회 부조리에 대한 변혁을 지향해왔고 1894년 2월 19일 전봉준을 비롯한 김개남 김덕명 서인주 최재형 등 13명이 손화중을 설득 갑오년 (1894년) 3월 20일 무장현 당산리 구수내에서 포고문을 발표하고 동학농민혁명 1차봉기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해 초겨울 공주 우금티전투를 시작으로 패전을 거듭하며 쫓기다가 겨울이 깊어가는 11월 말 순창 피노리에서 친구 김경천의 밀고로 붙잡혀 일본인이 배석한 5차례의 재판을 받고 사형이 언도된 후 다음날 죽을때까지도 자신의 의지와 신념에 조금도 굽힘이 없었으며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을 담아 마지막 시 한편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 했다.

때는 1895년 3월 30일이다.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진격로

- 안내문에서 -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지

이 곳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는 1894년 (갑오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이땅의 민중이 떨쳐 일어나 민족과 역사의 주인됨을 세계 만방에 선포한 우리 근대사의 자랑스런 혁명을 일으킨 곳이다. 당시 가장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농민들은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라고 하는 인본주의 사상의 동학교와 결합되면서 인간 본래의 인격과 존엄성을 지키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제도 관료사회도 청산하여 새 세상을 열고자 하였다.

당시 동학교 2세교주 최시형 (북접)은 충청도 보은에 좌정하고 있었고 무장현 괴피의 손화중 (남접) 대접주는 이른바 선운사 도솔암 미륵비기 탈취사건 이후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사발통문 거사계획등 고부농민봉기를 이끌었던 전봉준은 두어 달 동안의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인 계사년 12월 10일 공음년 구수내 송문수집에서의 회동에 이어 갑오년 2월 19일 공음면 신촌의 김성칠 접주집에서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서인주 임천서 송문수 정백현 강경중 김영달 고영숙 최재형 등 13명의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시기상조(時機尙早)를 말하며 미루어 오던 손화중을 설득, 동참을 이끌어 냄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동학농민혁명을 도모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구적산 아홉골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해 연병장 같은 모래사장이 크게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의 훈련과 집합에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전봉준을 도솔대장(都率大將)으로 한 농민군은 포고문(布告文)과 격문(檄文)등을 띄우고 보국안민창의(輔國安民倡義)의 큰 깃발을 높이 들고 동학농민혁명의 대장정에 오르게 된다.

- 안내문에서 -

 

동학농민군 훈련장

 

 

 

 

동학농민혁명 기념탑

이 기념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운동으로 이 나라 민족 민중 운동사의 큰 분수령을 이룬 갑오농민혁명의 제1차 봉기지로서 만천하에 창의 포고문을 선포한 발상지의 상징 탑이다.

전체적인 모형은 농민혁명의 강렬한 의지와 열성의 횃불을 형상화하였고 중앙 부조 조각은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대의를 위해 만방에 봉기할 것을 호소하고 포고문 선포의 역사적인 모습을 표현하여 그 당시의 역동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주위에 배치한 죽창은 그 때 농민군이 사용한 무기로써 분연히 떨쳐 일어섬을 나타냈으며 혁명의 참뜻을 기리고 자손만대에 그 교훈을 널리 기리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건립하였다.

 

동학농민혁명군 진격로

구수내 →두암→ 만화→교흥→아산교→고인돌→당촌→운양→덕흥→후포→목우→부안군 줄포

(발상지)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0-10

2002년 4월 25일

고창군. 고창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