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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 김주열의 묘. 남원시(南原市 ) 본문
열사 김주열의 묘. 남원시(南原市). 전북(全北)
지리성산 자락에 펼쳐진 남원은 만인의열. 동학농민혁명. 3.1독립운동의 기상이 살아 숨쉬는 고장이다.
김주열(金朱烈)열사는 이곳 금지면 옹정리에서 김해김씨 75세 손으로 아버지 김재계(金在桂)와 어머니 권찬주(權燦珠)의 둘째 아들로 1944년 10월 7일 태어났다.
열사는 옹정국민학교를 거쳐 금지중학교에서 중등교사가 될 꿈을 키우고 있었으나 졸업즈음에는 아버지의 숙환으로 고교 진학을 염려할 처지가 되었다. 1959년 금지중학교를 졸업한 열사는 남원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재수하여 1960년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장학생을 목표로 시험을 치렀다. 당년 3월 15일은 자유당 이승만 정권이 폭력과 회유로 정부통령 선거를 감행하는 날이었다. 마산에서는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3.15 의거가 일어났고 열사는 시위에 참여하였는데. 총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경찰의 시위 진압과정에서 열사는 행발불명되었고 이승만 정권은 3.15 의거를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용공분자들의 난동으로 몰았다.
어머니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열사는 27일만인 4월 11일 마산의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참혹한 시신으로 떠올랐다. 공산당으로 내몰렸던 마산시민들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2차 의거에 돌입하였고 이 시위는 4.19 혁명으로 이어져 이 민족 최초의 민주혁명으로 꽃 피웠다. 4월 11일 열사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에 4.19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1여년 후 군사 쿠데타에 의해 4.19 민주혁명은 짓밟히고 열사는 다시 묻혔으나 부마항쟁. 5.18. 6.10. 민주화운동으로 되살린 불씨는 4. 19 민주혁명이다.
살아서는 사랑스러운 호남의 아들이었고 죽어서는 자랑스런 영남의 아들이 되었으며 역사에는 영원한 민족의 아들이 된 열사는 국민화합의 큰 축이 되어 4.19 혁명 당시 통일의 열망을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이는 그 선봉에서 횃불을 밝혀 이끈 김주열 열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열사 서거 50주년을 맞아 묘지 정비 사업을 하면서 낡고 소략한 비문을 고쳐 써 세운다.
2010년 4월 19일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 비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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