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탈출...
앙부와즈 성(Château de Amboise) 안내서. 르와르(Loire) 본문
앙부와즈 성(Château de Amboise) 안내서.
르와르(Loire). 프랑스(France)
http://www.chateau-amboise.com/kr/
방문객 여러분. 문화유산 지원자 여러분
여러분의 방문은 쌩 루이 재단에서 프랑스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장소중 하나인 앙부와즈 왕궁을 보존하고 문화 유산을 이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부터 이 고성은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뺏지를 단 직원들이 대기 하고 있어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시면 언제든지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방문이 끝나시면. 미님(Mimmes) 탑의 기마병 경사길위에 설치되어 있는 아이패드의 터치 스크린을 이용하여 방문 소감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방문되십시요.
Sur les terrasses du Château Royal
테라스에 도착하면, 르와르 계곡의 경치가 파노라마 같이 펼쳐집니다. 15세기 16세기의 건축물들, 경사가 완만한 정원들 그리고 엄청난 크기의 웅장한 두 기마병 탑을 볼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 성은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왕궁으로 자리잡게 되어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예술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왕궁은 또한 플랑드르 그리고 이태리에서 영향받은 여러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태리는 16세기 전반부에 걸쳐 프랑스가 선망하는 나라로 예술적 활기를 찬양하였습니다. 따라서 왕정에서는 여러 이태리 예술가, 문학가들을 앙부와즈로 초대하여 그들의 영향과 프랑스적인 요소가 가미된 독창적인 <초기 프랑스 르네상스> 스타일을 창조하게 하였습니다.
앙부와즈 성은 건축 발전 역사상에서 고딕 양식과 프랑스 르네상스의 새로운 스타일 사이의 중간 스타일을 대표하는 완벽한 예가 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왕권의 핵심이 되는 이 성은 발루와와 부르봉 왕가의 왕실 자손의 탄생, 영세식, 왕실 결혼식, 음모 및 평화 조약 포교,
견교한 요새가 되는 이 성은 왕가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보장하였습니다. 정식으로 왕실이 거주하지 않은 경우에는 프랑스 왕들의 어린 시절 양육을 위한 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 샤를 8세가 이 성에서 태어났고, 프랑수와 1세와 그의 누이 마그릿뜨 당굴렘과 앙리 2세와 까뜨린느 드 메디치의 자녀들이 이 성에서 자랐습니다.
역사의 시작부터 르네상스시대 까지
앙부와즈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켈트 족인 투론느(Turonnes) 사람들이 고대 도시를 이루어 살았고, 오늘날 투렌느(Touraine) 지방 이름의 어원이 되었다.
높은 언덕 바위위로 방어적인 건축물들이 지어졌고 갈로 로망 기술 장인들의 발전을 촉진하게 되었다.
르와르 강과 아마스 강의 합류 지점에 있어 전략적인 위치에 설치된 요새이다. 기원후 4세기에 처음으로 앙부와즈 고도시 중부에 우뚝 세워진 본관을 보호하기 위해 외호가 파졌었다. 503년도에, 프랑스의 원조 프랑크족의 왕 끄로비시와 독일의 원조 위시고의 왕 알마릭의 만남이 북벽 정면에 골드 아일랜드에서 이루어졌다. 중세기에는 앙쥬 공작과 블루와 백작사이의 라이벌 의식을 배경으로 이 요새 점령을 치열하게 다투었다.
1214년, 프랑스의 왕, 필립 오귀스트가 투렌느 지방을 장악하여 앙부와즈 성이 그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1431년, 영지 소유주 루이 앙부와즈는 샤를 7세(1403/♕1422/†1461)의 총애를 받던 측근 트레무이여(La Tremouille)를 모함한 혐으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결국 그는 사면을 받아 목숨은 구하나 앙부와즈 성은 몰수 되어 왕가의 재산으로 귀속된다. 샤를 7세는 성에 친위대 프랑 사수대를 주둔시킨다. 그 뒤를 이어 계승한 루이 11세(1423/♕1461/†1483)는 왕비 샤를롯뜨 드 사부와가 거주하는 소탑 근처에 기도실을 건축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한 이 성에서 나중에 샤를 8세(1470/♕1483/†1498)가 되는 왕자 샤를 쥬니어가 1470년도에 탄생하였다.
발루와 왕조의 약식 계보
샤를 8세 통치 초기의 프랑스 왕국
불안정한 정국
샤를 쥬니어는 아버지 루이 11세 사망시 아직 미성년이어서 일시적으로 누이 안느 드 보져의 섭정아래 있었다. 그의 권위는 또한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이 브러탄녀 백작(1484)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앵(1486)과 동맹하여 위협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프랑스 왕에 대한 치열한 전쟁(1486-1488)이 시작 되었다.
샤를 8세 초상화 안느 드 브러탄녀
안느 드 브러탄녀와의 결혼
안느 드 브러탄녀는 브러탄녀 공작 프랑수와 2세의 상속녀 이었다. 공작의 영지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의 발루와 왕가사이의 경쟁의식에 관건이 되었었다. 브러탄녀 공작의 사망(1488)으로 프랑스 왕과의 전쟁은 막을 내린다.
샤를 8세는 오스트리아-영국-스페인의 동맹 (1489-1491)에도 불구하고 브러탄녀 지방을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합스부르크의 막스밀리엥과 영지의 상속녀의 결혼을 무효화 시키고 본인 또한 오스트리아 황제의 공주 마그리뜨 도트리슈와 파혼하여 1491년 12월 6일 안느 드 브러탄녀와 결혼한다. 이 결혼으로 인하여 1532년 브러탄녀 지방의 영지를 프랑스 왕조에 공식적으로 소속되게 되었다.
안느는 왕궁인 앙부와즈 성에 머물게 된다. 세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가 탄생하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한다. 이런 불행으로 인한 슬픔에도 불구하고 안느는 궁정에 본인의 스타일을 부각시킨다. 궁정에 귀족 가문 출신 또는 정숙한 여성들을 100명 이상 그룹을 형성하여 주위에 두면서 여성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시간(Heures)이라는 유명한 채색 삽화의 저자인 투렌느 지방 출신 화가 쟝 부르디숑, 그리고 조각가 미셀 콜로브 같은 재능있는 예술가들을 가까이 하였다.
앙부와즈 왕의 대형 건축 프로젝트
성의 남쪽 성벽에서 본 전망. 1517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케치
1491년에 안느 드 브러탄녀와 결혼한 샤를 8세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왕부와즈 성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결혼 이듬해, 중세기에 건설된 본관의 확장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성 위베르 소성당은 1493년에 완공되었고 그 후 계속 증축 공사가 이어졌다. : 7개의 미덕이라고 불리는 본관과 왕과 왕비가 거주하는 안채, 이태리 원정을 떠나기 전에 왕이 명령한 이 건축물들은 전형적인 고딕 스타일로 이루어졌다.
1496년 원정에서 돌아왔을때, 공사는 많이 진전되어 있었다. 돌아올 때 왕은 여러 이태리 장인들을 데리고 왔다. 이들에게 궁내 실내장식과 또한 이태리 빌라들에서 영감받은 정원들을 의뢰하였다. 왕이 실현한 프로젝트에서 가장 특기할 사항은 엄청난 크기의 두개의 웅장한 기마병 탑을 건설한 데 있다.
1498년 샤를 8세의 서거시, 성은 완공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5년도 채 안 걸려서 거의 대부분 건축이 이루어졌다.
쟈끄 안드루와 뒤세르쏘(Jacques Androu et du Cerceu) 의 판화
<프랑스 왕정시대의 우수한 건축물>에서 발췌 (v. 1576)
복쪽 높은 곳에서의 전망 : 성 남쪽 프로젝트
프랑스 왕의 이태리 군사 원정과
앙부와즈에 처음으로 이태리 장인들 도착
나폴리의 왕 페랑 1세가 사망하자,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 통치권을 주장하였다. 나폴리 왕국은 1442년부터 아라곤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공식 통치자는 프로방스의 마지막 백작 샤를 뒤 멘느였다. 샤를 8세는 이 백작에 대한 상속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494년 3만명의 군을 거느리고 나폴리 왕국 점렴을 위해 출발하였다. 프랑스 군은 1495년 2월 나폴리에 도착하였다. 이태리와의 전쟁은 이렇게 샤를 8세에 시작하여, 루이 12세와 프랑수와 1세까지 나폴리 왕국 또는 밀라노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계속 이어졌다. 여러 번의 승리 (가장 유명한 승리는 1515년의 마리냥 승전)와 프랑스 점령에도 불구하고 이런 원정은 프랑스 왕정에 결국 불리한 상황을 불러 일으켰다. 1559년 앙리 2세는 이태리 반도에 프랑스 점령 목표를 포기하는 까또 깜브레시스 조약를 체결한다.
이런 이태리 원정을 통해서 프랑스 왕들은 이태리 르네상스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었다.
화가 안드레아 델 샤르토 그리고 유명한 화가이자 엔지니어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이태리 예술가 문학가들을 앙부와즈에 초대한다.
샤를 8세 나폴리 공식 입성
왕궁 본관 정면의 마당과 해자(깊은 도랑)
왕궁 본관 왼편 건물에 가까이 다가가시면 입구 왼편으로 해자를 볼 수 있습니다.
성 해자에서 생긴 비극적인 공놀이
유명한 연대기 작가 필립 드 코민드가 이 슬픈 에피소드를 기술하고 잇다 : 1498년 4월 7일, 샤를 8세는 왕비 안느 드 브러탄녀와 같이 오늘날 테니스와 유사한 져드 뽐 경기를 관람하러 성의 북에서 남으로, 7갱의 미덕 건물과 왕실 본관을 연결하는 해자(17세기에 성토했다가 다시 19세기에 일부 파여진)을 옆으로 건설된 갤러리 아끌박(Haquelbac)로 가는 중이었다. 왕은 문을 지나다가 문 위턱에서 세게 머리를 부딪혀 몇 시간 후 28세의 젊은 나이로 후세를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앙부와즈, 르와르 계곡의 최초 르네상스식 건축물
왕실 본궁
왼쪽에서오른쪽,
고딕양식 천창(샤를 8세 본궁)과 르네상스 스타일 천창(프랑수와 1세 르네상스 본궁)
샤를 8세 서거이후, 남쪽 성벽에 기대 세워진 2번째 기마병 탑인 에르토(Heurtault) 탑과 돔파첼로(Dom Paccello)가 조성한 정원을 둘러싸는 갤러리는 샤를 8세를 승계한 루이 12세(1462/♕1498/†1515)의 통치기간동안 완공되었다.
루이 12세가 사망한 후 프랑수와 1세(1494/♕1515/†1547)가 집권하게 되는 데 그는 어린시절 앙부와즈 성에서 자란 추억을 살려 앙부와즈 시에 세제 특혜를 갱신하였고, 르와르 강에 비해 수직으로 건축된 측면 별관을 높히 신축하게 한다. 벽기둥으로 장식된 별관의 천창들은 이태리의 영향을 확고히 표현하고 있으며, 르와르 강에 평행되는 샤를 8세의 본관의 고딕 양식의 특징인 뾰족한 첨탑 장식 천창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앙리 2세는 동쪽에 다시 별관을 건축하게 하는데 이는 왕실 본궁의 르네상스식 별관과 평행하다. 이렇게 증축이 계속되어 성은 한때 최대 220칸의 방들을 가지고 있었다.
05. 근위 장교실
귀족 근위 장교들이 왕의 경호를 보장하였다. 이 방에서 왕이 거주하는 처소를 올라가는 계단을 통제하였다.
루이 14세의 귀족 근위 기병대의 대장이었던 달따냥은 파리에서 열리는 실격된 대신 니꼴라 푸케를 재판을 위해 호송 하던 중 이 성에 1661년 12월 4일부터 16일까지 머물기도 했었다.
● 성 전반도 : 쟈끄 안드루에 뒤 세르쏘(J. Androuet du Cerceau)(1576)의 저서 (프랑스의 가장 우수한 건축물들>에서
● 첨두형 궁륭.
● 이 방 전체 천정을 받치고 있는 중앙 기둥 또는 <고딕 양식의 야자수> 기둥.
● 16세기 갑옷의 복제품 (19세기)
● 17세기 해군용 무기 상자.
가티 엥 드 꾸르틸즈 드 산드라가 그린 달따냥의 초상화
17세기 해군용 무기 상자.
15. 오말(Aumale) 갤러리
이 갤러리는 루이 필립 왕의 다섯번째 아들, 오말 공작(1822-1897) 이름을 따서 지었다. 그는 1895년 부터 성의 소유자이었다.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그는 또한 프랑스 연구소(I'Institut de France) 주관아래 샹티이(Chantilly) 성에 오늘날 보관되어 있는 고문서와 예술 작품들 수집을 시작할 수 있게 한 위대한 예술 옹호자이기도 하였다.르네상스시대에는, 이 갤러리는 앙리 2세왕이 거주하는 지금은 없어진 본궁(오른쪽), 그리고 그 자녀들이 거주하는 (왼쪽에 평행하는 궁)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정원으로 갈 수 있었다.
16. 르네상스식 정원의 대표인 나폴리 테라스
갤러리 오말의 왼쪽으로, 보리수 나무들이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세 군데의 전망대로 르와르 강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나폴리 테라스(15세기 말 - 16세기 초기) 가 있다. 이 테라스는 15세기 말 나폴리 출신의 정원 설계사 돔 파첼로 다 메르코글리아노(Dom Pacello da Mercogliano)가 설계하였다.
이 정원은 전통적으로 담으로 둘러싸여 닫힌 중세기식 정원에서 벗어나서 전망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정원 스타일을 소개하고 있다. 이 정원에 당시 이태리에 널리 재배하던 야채 과일들을 소개하였다; 멜론, 아티초크 그리고 감귤류.
뒷쪽 테라스는 성의 북동쪽에 중세기 성벽을 따라 구성되어 있고 소사나무들이 심어져 있는데 원래 이 장소에 세 번째의 기마병 탑을 샤를 8세가 세울 계획이었다. <고슴도치> 전망대에서 성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해자를 볼 수 있다.
고슴도치: 루이 12세의 상징. 고슴도치 전망대. 나폴리 테라스
17. 조경된 정원들
강을 뒤로 하고 남쪽을 바라보면, 옛 로마식 정원의 여러 산책로들이 보인다. 최근 몇년동안 새로 식목한 사철푸른 떡갈나무, 회양목, 실편백 그리고, 사향포도 나무들이 이태리의 영향을 암시하고 있다.
남동 테라스아래로 웅장한 레바논 삼목이 지배하는 오리엔탈 정원은 2005년 아티스트 라시드 코라이시(Rachid Koraichi) 가 설계하였는데, 에미르 압델 카테르(Abd el Kader)를 따라와 앙부와즈 성에 머물다 사망한 추종자들을 추념하고 있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묘석들이 메카 성지를 향하는 그린 라인에 의해 균형이 깨어져 있다.
로즈메리, 쟈스민, 월계수, 실편백 나무들이 지중해 연안 주위의 풍경을 연상 시킨다.
- 안내문에서 -
'서유럽 > 프랑스 (Fra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Musée de L'Hôtel de Ville. 앙부와즈(Amboise) (0) | 2014.08.14 |
---|---|
Eglise Saint-Florentin. 앙부와즈(Amboise) (0) | 2014.08.14 |
쉬농소(Chenonceaux) 에서 앙부와즈(Amboise) 까지 (0) | 2014.08.14 |
상점 및 매표소. 쉬농소 성(Château de Chenonceau). 르와르(Loire) (0) | 2014.08.14 |
주방. 쉬농소 성(Château de Chenonceau). 르와르(Loire) (0) | 2014.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