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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碑閣). 영릉(英陵). 여주시(驪州市) 본문

나라안 나들이/경기도

비각(碑閣). 영릉(英陵). 여주시(驪州市)

세계속으로 2016. 3. 10. 16:16

비각(碑閣). 영릉(英陵). 여주시(驪州市). 경기도(京畿道)

 

영릉비(英陵碑)

세종대왕릉(英陵)은 원래 헌릉(지금의 서울 내곡동) 서쪽 산줄기에 있었는데 예종 1년(1469)에 이곳으로 천장하였으며, 왕비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다.

영릉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그리고 영릉을 옮긴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영조 21년(1745)에 세웠고, 비각도 이 때에 건조되었다.

비문에는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祔左)"라고 새겨 왕비가 대왕의 왼편에 묻혔음을 기록하고 있다.

 

영릉비(英陵碑)

영릉은 조선 제 4대 왕인 세종의 능이다. 세종의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이며 태종()의 세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다. 1397년 4월 10일에 출생하여 1418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같은 해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왕은 총명하고 평생 학문에 열중하여 문화 및 정치적으로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집현전을 설치하고 학문이 깊은 문신을 모아서 국조오례의 삼강행실 치평요람 역대병요 자치통감훈의 등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글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이로써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의 가사를 직접 지었으며 중국글자의 음을 바로 잡기 위하여 동국정운을 편찬하게 하였다. 또 천문학에 관심을 기우리어 측우기 등 각종 천문실측기계를 제작하여 흠경각에 비치하였으며 이에 관한 문헌으로 칠정내외편을 편술하였다. 악기인 종과경을 새로 만들어 음악의 표준을 세우고 정간보를 창안하여 아악을 정리하는 등 국악의 기틀을 바로잡았다. 한편 불교의 다섯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정리한것은 종교정책의 한 혁신이었다. 국경을 북으로 개척하여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설치하고 압록강 상류지역에 사군을 새로 두어 여진족의 야인을 정복하였고 또 대마도를 토벌하여 위세를 떨치었다. 재위 32년째인 1450년 2월 17일 54세로 승하하여 광주(廣州) 헌릉(獻陵)의 서쪽인 지금 서울성 동구 내곡동에 장사했다가 1469년 3월 6일 이곳에서 이장하였다. 본시 정인지가 지은 영릉신도비명이 있었는데 이장할 때에 땅에 묻었던 것을 근년에 다시 발굴하여서 서울에 있는 세종대왕 기념관에 세웠으나 글자가 마멸되어 읽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여기에 그 대강을 옮겨 둔다. 세종의 시호는 장헌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이다. 왕비는 소헌왕후() 심씨인데 왕과 함께 영릉에 장사하였다.

1983년 12월

임창순 짓고 황석봉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