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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영릉(英陵). 여주시(驪州市) 본문
아름다운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영릉(英陵). 여주시(驪州市). 경기도(京畿道)
세종대왕 탄신 618돌
숭모제전 기념 사진전
아름다운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영릉(英陵) 이야기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임금인 세종(재위 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합장릉이다. 1446년(세종 28년)에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헌릉 서쪽 산줄기(현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쌍실무덤인 영릉(英陵)을 만들어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1450년(문종 즉위년)에 왕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조선왕릉 중에서 최초로 한 봉분에 서로 다른방을 갖추고 있는 합장무덤의 형태로 세조때부터 영릉(英陵)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 등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결국 1469년(예종 1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됩니다.
영릉(英陵)을 여주로 옮긴 이후, 그 능지가 천하의 명당이라 조선의 국운이 100년이나 더 연장되었다며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란 말이 생겨났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릉은 장헌대왕(莊憲大王)(세종)이 묻힌 곳이다. 땅을 팔 적에 오래된 표석(標石)을 얻었는데, 그 곳에 마땅히 동방의 성인을 장사지낼 터이며, 풍수사가 말하길 '용이 몸을 돌려 자룡(子龍)으로 입수하고, 신방(申方)에서 물을 얻어 진방(辰方)으로 빠지니 모든 능 중에서 으뜸이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영릉을 수호하는 석호의 모습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름다운 영릉(英陵)
영릉(英陵)의 봄
영릉(英陵)의 여름
영릉(英陵)의 가을
영릉(英陵)의 겨울
영릉(英陵)의 숨겨진 명소
진달래 동산
매년 4월이면 영릉(英陵) 오른쪽 능선을 따라 우리나라의 대표적 봄꽃인 진달래가 아름답게 무리지어 푸른 소나무와 어우러진 장관을 연출합니다.
평소에는 비공개지역이라 들어갈 수 없지만, 진달래가 만개하는 4월중순부터 말까지 10여일 동안 진달래동산을 개방합니다.
영릉(英陵)/영릉(寧陵)간 산책로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대왕 영릉(寧陵)을 이어주는 산책길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가 됩니다.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의 과거, 현재
봉분 뒤에서 바라본 세종대왕 영릉(英陵)
1931년 (조선고적도보 11권 당시) 영릉(英陵)의 모습
현재의 영릉(英陵)의 모습
세종대왕 영릉(英陵)
1931년 (조선고적도보 11권 당시) 영릉(英陵)의 모습
현재의 영릉(英陵)의 모습
효종대왕 영릉(寧陵)
1931년 (조선고적도보 11권 당시) 영릉(寧陵)의 모습
현재의 영릉(寧陵)의 모습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의 옛 모습
1964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행사
정자각에서 바라본 풍경
1966년 5월 15일 세종대왕 탄신기념 행사
지금과 달리 좌우측에 계단이 없어 사람들이 사초지를 자유롭게 다니고 있습니다.
사진에 의자가 놓여져 있는 장소가 현재 수라간이 위치한 곳입니다.
수라간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 복원하였습니다.
1967년 한글날 행사
홍살문의 위치가 현재와 달리 정자각과 매우 가깝습니다.
영릉의 소나무를 멋지게 그리던 이 여고생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
1970년 재실복원 공사 모습
재실은 원래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담당하였던 종9품의 참봉이 상주하던 건물로 산릉제례시 제관들이 머물러 제례를 준비하던 장소입니다.
원래의 재실은 현재 관리소와 영릉 휴게소 사이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되어 없어진 것을 1970년에 복원하였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계시는 바로 이 곳입니다.
1970년 여름 영릉 진입로
1970년 10월 8일 제 9회 세종문화큰잔치
참도에 앉아서 그림그리기에 열중인 여학생들의 모습입니다.
세종대왕 영릉 성역화 조감도
1971년 영릉 재실 봉헌식
동상의 위치가 현재와 다릅니다.
정화사업을 하면서 뒤쪽으로 옮겨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1971년 10월 세종대왕 동상 제막식
1971년의 효종영릉 재실의 모습
당시에는 재실에서 사람이 직접 살면서 능을 관리하였습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네요
1972년 10월 10일 세종문화큰잔치
동상앞에서 위문공연이 열리고 군중들이 운집해 있는 장면입니다.
1973년 훈민정음 527주년 한글날 기념행사때 영릉의 전경
1974년 효종대왕릉에서 여학생들이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
'확성기 사용금지', '관광지 정화는 국민의 의무'등의 문구가 눈에 띕니다.
1975년 10월 9일 박정희 前 대통령 영릉(英陵) 참배
영릉(寧陵) 이야기
영릉(寧陵)은 조선 제 17대 임금인 효종대왕 (즉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 (1618~1674)의 쌍릉입니다. 원래 건원릉(경기도 구리시) 서쪽에 있었으나 봉분을 보호하는 병풍석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1673년(현종 14년)에 이 곳으로 옮겨 왔으며 그 다음해인 1674년 인선왕후를 모시게 됩니다.
영릉(寧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풍수지리에 의해 앞뒤로 엇비슷하게 조형한 특수한 형식의 쌍릉으로 이런 형식을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며, 이후 경종의 의릉이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영릉(寧陵)은 왕의 무덤에만 곡장을 둘러 왕후의 무덤과 구별하였고 나머지 석물의 배치와 규모는 동일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영릉(寧陵)
영릉(寧陵)의 봄
영릉(寧陵)의 여름
영릉(寧陵)의 가을
영릉(寧陵)의 겨울
영릉(寧陵)의 재실
왕릉의 재실은 제관의 휴식, 제수장만과 제기 보관 등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들이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어 원형이 훼손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곳 효종 영릉(寧陵)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고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효종 영릉의 재실은 전반적으로 외벌대, 장대석기단, 방형초석, 각주, 민도리 홑처마 집으로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세부수법이 짜임새 있게 건립되었으며, 안향청, 제기고, 재방, 전사청, 행랑채(대문 포함), 우물 등의 시설도 온전하게 보존되어 유기적으로 적절하게 배치돼 있고, 경내의 재향과 관계있는 향나무와 느티나무, 회양목(천연기념물 제 495호)등의 고목과도 어울려 있어 그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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