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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南門). 독산성(禿山城). 오산시(烏山市) 본문
남문(南門). 독산성(禿山城). 오산시(烏山市). 경기도(京畿道)
독산성 남문(禿山城 南門)
남문은 독산성의 정문으로 진남루(鎭南樓)라는 문루가 있었다. 1831년 편찬된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1)의 규모는 6칸 이었으며, 남문은 영조, 정조, 순조 때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문으로는 말과 소가 다닐 수 있었으며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79년 복원하여 정비한 것이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2) 2개가 남아 있다.
1) 문루(門樓) : 궁문, 성문, 지방관청의 바깥문 등의 위에 지은 건물
2) 문확석(門確石) : 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것
남문 보수 전 모습(1978년) 남문 보수 후 모습(1980년)
정조의 효심이 담긴 독산성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가 찾은 독산성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환궁 하던중
장마 때문에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고 백성들에게 몇가지 이야기를 남기고 갔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뒤 풍수지리의 문제로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지만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오히려 독산성을
더 고쳐 쌓도록 명하여 지금의 독산성의 모습이 갖춰졌습니다.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유적
독산성의 연혁
● 사적 제140호로 지정(1964. 8. 29)
● 삼국(백제)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짐
(이후 통일신라 ~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용)
●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천일의 항전과 권율장군의 세마병법 일화로 유명함.
●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쌓은 기록<순조 31년(1831)>과 봉수대를 설치한 기록이 있음.
● 숙종 16년(1690)에는 수원화성과 함께 수원유수부의 남쪽을 방어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
●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가 모두 다녀간 성으로 이곳에 머물러 백성들의 고충을 위로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정조의 효심을 느낄 수 있는 곳임.
독산성의 조사경과 및 향후계획
● 1999년 지표조사 실시(한신대학교박물관)
● 2000년 시굴조사 실시(경기문화재연구원)
● 2016년 학술지표조사(중부고고학연구소, 한신대학교박물관)
● 2017년 시굴조사(중부고고학연구소. 한신대학교박물관)
● 2017년 정밀발굴조사 (1차) (중부고고학연구소, 한신대학교박물관)
● 2018년 정밀발굴조사 (2차) (중부고고학연구소. 한신대학교박물관)
●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기 위한 지속적인 정밀발굴조사 예정.
독산성의 '2017년' 조사결과
● 면적 : 700㎡ (남문 내측 일대)
● 유구 : 조선시대 건물지 2기, 축재 4단, 석축유기 2기, 배수로 1기
● 유물 : 통일신라~조선시대 토기, 도기, 청자. 분청사기, 백자, 와당, 기와, 전돌, 단석
● 결과 : 조선시대 후기까지 사용된 흔적을 확인
특히, 배수로와 함께 확인된 석축유구(2호)는 배수 및 집수와 관련된 시설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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