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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芬皇寺). 경주시(慶州市) 본문
분황사(芬皇寺). 경주시(慶州市). 경북(慶北)
분황사 석탑 (芬皇寺 石塔)
국보 제 30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
이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 (634) 에 안산암(安山巖)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에 일본인이 허물어진 것을 해체, 수리 하였다.
1층 몸체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위에는 네 마리의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다.
탑에서 나온 돌 사리함(舍利函] )에는 여러 가지 구슬, 가위, 금, 은바늘과 은합, 숭령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 등이 들어 있어, 고려 숙종(肅宗), 예종(睿宗) 연간에 해체, 수리되었던 것을 알수 있다.
- 634년 (선덕여왕 3)에 창건된 신라 7가람 중 하나로 원효, 자장 등 한국 불교의 중심이 되었던 대승들이 거쳐 간 사찰이다. 경내엔 전탑을 모방한 국보 제 30호 분황사 모전석탑이 있으며, 신라시대 석탑으로는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웃해 있는 황룡사와 함께 신라의 대표 사찰이었으며 현재까지 법등이 이어오고 있다.
- 안내문에서 -
국보 제 30호
명칭: 분황사석탑
분류: 모전탑
지정일: 1962년 12월 20일
시대: 신라 선덕여왕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芬皇寺 和諍國師碑蹟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97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
이 비부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원효대사(元曉大師)비의 받침돌이다.
비석은 고려 숙종(肅宗) 6년 (1101) 8월에 내린 조서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들어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비편만 가끔씩 발견되고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비신을 받혔던 비대를 경내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 하였다. 현재 비대석에는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和靜(諍)國師之碑蹟] "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비대는 직육면체이고, 상면에는 비신을 삽입하는 직사각형의 홈이 파여 있다.
- 안내문에서 -
분황사 석정
(芬皇寺 石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9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
이 것은 호국룡변어정(護國龍龍魚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 틀의 외부는 높이 70 cm 의 8각이고,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四聖諦)를 뜻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원성왕(元聖王) 11년 (795)에 당(唐)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동지(東池). 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八角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다시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 안내문에서 -
분황사 약사여래입상
(芬皇寺 藥師如來立像)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319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
이 불상은 보광전(寶光殿)에 모셔져 있으며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 약그릇(乾漆製 藥盒)의 뚜껑 안쪽에 "건륭삼십구년을미사월이십오일조성야(乾隆三十九年乙未四月二十五日造成也"라는 붉은 글씨가 남아 있어 조선 영조(英祖) 50년 (1774)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낮은 상투 모양이 표현된 머리에는 석회를 뭉쳐 만든 나선형 머리카락을 부착하였으며,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처리하여 장대한 신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의 사이에는 화형으로 접고 띠를 두른 군의가 U자형으로 층단을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무릎 밑에 이르러 3단으로 접혀 있다.
대좌(臺座)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판석으로 대신하고, 불상 앞에 놓인 석제 불단은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탑신석(塔身石)을 받침으로 삼고 있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제작연대가 확실하여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안내문에서 -
대원심 보살 사리탑
(大願心 菩薩 舍利塔)
대원심 보살(月城崔氏 順伊) 께서는 불기 2404년 (1860)에 태어나시어 불기 2479(1935)에 열반 하셨다. 어려서 부터 불도에 지극 정성으로 정진 하셨는데 불기 2477년 (1933) 살아 계실때 치아(齒)에서 백옥(부처님 모양)의 사리가 나와 온 세상이 경탄하여 그 불도 정성을 기리고자 이 사리탑에 봉안 분황사에 모셨다
- 안내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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