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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전시실. 삼국의 항쟁사. 백제군사박물관. 논산시(論山市) 본문

나라안 나들이/충청남도

제 1전시실. 삼국의 항쟁사. 백제군사박물관. 논산시(論山市)

세계속으로 2013. 3. 3. 17:18

제 1전시실. 삼국의 항쟁사. 백제군사박물관.

논산시(論山市). 충남(忠南)

 

삼국의 항쟁사

한성시대 (BC 18-AD 475)

3세기-성장기

마한을 구성하고 있던 54개의 소국(小國)중 하나에 불과했던 백제가 목지국을 대신하여 한강유역의 실질적인 중심세력으로 자리매김한 시기이다. 이제 백제는 낙랑, 대방군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전까지의 방어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자세로 바뀌게 된다. 기회가 닿으면 낙랑군을 공격하기도 하고, 신라군과 싸우기도 하였다.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한 것도 이 무렵이다. 고이왕(234-286)이 관등을 설치하고, 복색을 제정하여, 왕 스스로도 의관을 갖춰 입고 정사에 임한 것은 이렇게 나날이 성장하고 있던 백제의 자신감의 표출이었다고 할 수 있다.

 

 

 

4세기-정복기

백제가 마한 54국을 모두 정복하여 왕국을 형성한 시기이다. 그러한 정복활동은 주로 근초고왕(346-375)대에 이루어졌는데, 이로써 백제는 경기, 충청, 전라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백제는 그 여세를 몰아 소백산맥을 넘어 가야지역에까지 진출하게 되었으며, 다시 북진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평양성전투에서 전사시킴으로써 대방고지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갖게 된 셈이다. 중국쪽 기록에는 백제가 이때 중국의 요서지방과 산둥지방에도 진출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웅진시대 (AD 475-538)

5세기 - 수난기

고구려의 국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백제가 수난기로 접어든 시기이다.

광개토대왕의 끊임없는 공격과 장수왕의 평양 천도로 큰 위험을 느낀 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먼저 공격하고, 청목령(현재의 개성)에 큰 목책을 설치하는 등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433), 북위(北魏)에도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유도하는 등 대외관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백제의 움직임은 오히려 고구려를 자극하는 결과가 되어 장수왕이 475년에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게 된다.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신라가 구원병을 보냈으나 왕도에 이르기도 전에 7일만에 고구려 군사에 의해 왕도 한성(漢城)이 함락됨으로써 개로왕은 죽음을 맞이하고, 백제도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6세기 전반 - 부흥기

멸망의 위기를 겪은 백제가 무령왕, 성왕의 노력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이다. 중국 남조 및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권력을 다진 무령왕은 재위 기간 중 수 차례에 결친 고구려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고, 512년에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크게 이기기도 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여러 차례 고구려을 격파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무령왕이 받은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도 이때 받은 것이다.

무령왕을 뒤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도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대내적 개혁을 통해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 성왕은 마침내 551년 신라군, 가야군 등과 합세하여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하였다. 작전은 멋지게 성공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개군()을 차지하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개군을 차지하였는데, 곧바로 신라 진흥왕이 배신하여 한강하류지역을 다시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사비시대 (AD 538-660)

6세기 후반 - 격전기

120년간 지속되던 나제동맹이 깨지고 백제의 신라 공격이 본격화된 시기이다.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긴 성왕은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아들 부여창(위덕왕)과 함께 신라 공격에 나선다. 경주와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던 보은의 삼년산성을 빼앗기 위해 관산성전투를 일으켰으나 신라의 매복군대에 의해 성왕이 오히려 전사한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위덕왕은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 또한 이에 맞서 싸우면서 양국은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전에 휘말리게 된다. 또한 고구려까지 한강 유역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재차 남진을 추진하면서 삼국은 서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격전을 하루가 멀다하고 치루게 된다.

 

 

7세기 - 멸망기

의자왕은 무왕의 뒤를 이어 등국하자마자 신라를 공격하였다. 642년에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40여성을 함락시켰으며, 뒤이어 윤충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을 빼앗았다. 거듭되는 승전은 의자왕을 자만에 빠지게 하였고, 마침내 당나라 태종을 설득한 김춘추의 노력에 의해 신라와 당나라는 군사동맹을 맺는다.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은 황산벌에서 저항하는 계백의 백제군을 격퇴하고 사비도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마침내 의자왕은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는 개국한지 678년만에 멸망하였으며, 의자왕은 태자 융을 비롯한 효, 태, 연 등의 아들과 대신 88명, 백성 1만 2천 여 명 등과 더불어 당나라 서울로 압송된 후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 안내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