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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 축조. 제 1전시실. 백제군사 박물관. 논산시(論山市) 본문

나라안 나들이/충청남도

토성 축조. 제 1전시실. 백제군사 박물관. 논산시(論山市)

세계속으로 2013. 3. 3. 17:19

토성 축조. 제 1전시실. 백제군사 박물관. 논산시(論山市). 충남(忠南)

 

토성의 축조

(Construction of Earthen Castle)

초기 단순한 목책(木柵)으로부터 발전한 토성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채용된 축성 기법이다. 토성은 평지에 위치한 경우 판축 기법을 주로 사용하였고, 산이나 구릉에 만들어진 토성의 경우 판축기법과 삭토기법, 성토기법의 3가지 축조방법이 고루 사용되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부분의 토성을 주로 판축 기법을 활용한 것으로 성벽이 비교적 견고하여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판축(版)기법은 우리나라에 일찍부터 도입되어 초기 성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백제의 경우, 풍납토성, 몽촌토성, 청주 정북동토성, 부소산성 등지에서 판축 토성이 확인되었는데,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동안 사용된 기법임을 알 수 있다.

 

1. 터파기의 진행

성체를 시설하기 위하여 기초시설을 방법, 즉 흙 멈추개 시설의 마련, 기단석의 배치 등을 표시한다. 성을 축성하고자 하는 정상부 주변 혹은 정상부에서 중간에 이르는 지역을 L 자식으로 깎아 낸 다음 성벽이 지날 지점을 표시한다. 이떄 성벽의 바깥선이 지날 곳을 역  L 자식으로 파서 턱을 만들어 놓음으로서 성벽이 밖으로 밀리지 않도록 한다.

 

 

2. 영정주의 설치

터 닦기가 끝나면 실제로 판축을 하여 성벽을 축조하기 위해 나무기둥을 세운다. 나무기둥은 성벽과 동일한 방향과 직교하는 횡방향을 세우고 각재와 원형 기둥을 이용하여 종방향의 영정주는 약 1.2m 간격으로 조밀하게 세운다. 성벽의 폭은 약 6m 내외가 되며 횡방향으로는 3 m 내외가 되도록 하여 두 번에 걸쳐 성벽을 축조 할 수 있도록 한다.

 

 

3. 판축작업의 진행

영정주가 설치되면 이어서 생토면부터 판축을 하여 성벽을 축조하는데 사질토와 점토를 약 5-6 cm 정도 두께로 쌓고 매 층마다 두드려 단단하게 축조될 수 있도록 한다. 단면상에 켜켜이 쌓은 성벽의 판축층이 보여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4. 보조 방어시설의 마련과 완성

완성된 성벽의 상단에 여장을 설치한다. 성벽의 체성이 완성된 다음에는 그 안팎으로 일정부분을 덧대어 전체적으로 토성을 완성하고 성벽 정상부에는 여장을 설치한다. 토성의 성벽 바깥쪽으로는 외호 (성을 둘러 싼 연못)가 돌려지는 경우도 있다.

 

 

 

 

 


성곽의 구조와 축조재료

(Structures & Building Material of Castle Walls)

성곽의 구조

성곽이란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올린 큰 담으로 내성과 외성을 모두 일컫는 말이다. 성곽의 기원은 대체로 기원전 1-2세기경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집단 거주지에 설치한 방어시설, 즉 둑이나 환호(環壕:짐승과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집단거주지 둘레에 판 좁고 긴 도랑형태)에서 비롯되었다.

성곽은 지형적인 조건과 특성에 맞게 축성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산지가 많아 산성이 발달하였다.

장대

   지휘관이 머무르는 군사지휘본부

옹성

   유사시 적의 공격이 집중되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에 설치하는 방어시설,

    보통 사각형이나 반원형으로 되어 있다.

여장

   성체위의 구조물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 방패의 역

   할을 하면서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해 구멍을 내었다. 성벽의 연장으로 높게 축조하였다.

   공격과 방어의 기능을 가진 근. 원총안, 타구 등의 구조를 설치하였다.

공심동

   전시에 사용되는 장거리 관측소로써 위아래에 구멍을 많이 뚫어서 바깥동정을 살필수

   있을 뿐 아니라 총포를 쏠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각루

   각루는 정찰, 군량 운반통로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원거리 전망이 좋은 성곽

   모퉁이 요소에 자리하고 있다.

노대

   노대란 누각이 없이 전돌을 쌓아 네모꼴의 대로 만들었는데 모서리를 깍아 모를 없앤

   높은 대이다. 적의 내습을 감시해서 대와 성 전체에 신호를 하며, 적이 가까이 접근했을

   쇠뇌(석궁)를 쏠 수 있게 만든 곳이다.

봉돈

   봉돈은 파수를 설치하여 정찰과 정보전달의 임무를 수행하는 곳으로 육지로는 용인의

   석성산 육봉과 연락하고 바다로는 홍천대의 해봉과 연락하였다.

치성

   치성이란 이름은 꿩(雉;치)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는 까닭에 이 뜻을 딴

   것이다.

   치성위에 지은 누각을 포루라 하고 또 이와는 약간 다르나 대포를 장비한 것을 포루라 한다

   성벽이 휘어 돌아가는 모퉁이의 돌출부에 세운 누각을 각루라 한다.

   또 성문의 좌우에 배치한 치성으로 성문을 수호하기 위한 것을 적대라 한다.

해자

   성벽주변에 호를 파거나 둔덕을 만든 인공적인 구조물로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시설물

   이다. 일반적으로 물이 있거나 흐르는 경우는 해자라 하고 물이 없는 경우는 황(隍)이라고

   하였다. 성벽 외곽에다 성벽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넓고 깊게 팠다.

   해자는 성벽의 외부에만 설치한 것이 아니고 성의 내부에도 설치 하였는데, 해자를 팔 때

   생기는 흙은 토루, 내탁 등의 축성 재료로 사용하였다.

 

성곽(城郭)의 종류

위치에 따른 분류 : 산성. 평지성.

기능에 따른 분류 : 도성 (왕성), 읍성, 창성, 진보, 행재성, 행성 등

재료에 따른 분류 : 목책성, 토성, 석성, 전축성 등.

 

 

성곽(城郭)의 축조재료

1. 목책성(木柵城)

성곽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다. 청동기시대의 마을 유적에서도 확인된 바가 있다.

커다란 구멍을 파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서로 연결하여 울타리를 완성하는 방식이다.

토성(土城)의 일부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축조되기도 하였다.

 

2. 토성(土城)

목책성과 함께 초기의 축성 방법으로

조선시대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던 축조방법이다.

축조방법에 따라 크게 판축, 삭토, 성토의 기법으로 나뉜다.

            판축 기법                         삭토기법                           성토기법

 

판축()기법

판축()기법은 점도(粘度)가 다른 흙을 이용하여 교대로 쌓는 방식이다.

판축 토성은 성벽 아래 부분에 석축 기단이 없는 것과 있는 것이 있다. 비교적 견고하여, 오랜시간을 견딜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백제의 경우, 풍납토성, 몽촌토성, 청주정북동토성, 부소산성 등 현재까지 남아있는 대부분의 토성은 주로 판축 기법을 활용한 성벽이다.

삭토(削土) 기법

삭토(削土)기법은 경사면을 'ㄴ'자로 파서 얻어진 흙으로 바깥을 다지는 방법이다.

바깥은 높고 안쪽은 낮은 형태이다.

성 안쪽은 성벽을 보호하고 군사의 이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구덩이 형태의 통로를 마련하였다.

성토(盛土)기법

성토(盛土)기법은 성벽 안팎의 흙을 쌓아 올려 만든 고대 성곽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성 안팎에는 자연스럽게 구덩이가 만들어져 방어력을 높일 수 있다.

 

3. 석성(石城)

성벽을 돌로 쌓아올린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의 주류를 이룬다. 성벽의 축조에 사용된 성돌로는 자연 할석, 다듬은 성돌, 판석 등이 있다. 석성은 토성에 비해 축조가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지만 한번 축조하면 방어력도 뛰어나고 유지관리도 편리하기 때문에 점차 석성을 많이 축조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다듬은 성돌을 많이 이용한 반면에 시대가 내려올수록 자연석을 이용하는 경향이 더 커졌다. 성벽은 축조방식에 따라 협축식과 편축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단면상 직선형쌓기와 곡선형쌓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협축식(夾築式)성벽

협축식성벽은 성벽의 안팎면을 모두 돌로 쌓은 방식을 말한다. 이 때 바깥쪽 성벽의 성돌은 크고 정교하게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는 반면에 안쪽 성벽은 작고 덜 정교한 성돌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평지는 지나는 구간이라든가 성문 주변과 같이 유사시 집중 공격을 받는 부분에서 주로 볼 수 있다.

편축식(片築式)성벽

협축식과 달리 성벽의 바깥쪽면만을 돌로 축조하고 안쪽면은 흙이나 잡석으로 뒷채움하는 성벽을 말한다. 협축식에 비해 손쉽게 축조할 수 있고, 경제력과 인력을 줄일 수 있어 주로 산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석성쌓기 단면도

     수직쌓기                              궁형(弓型)                              홀형(忽型)

* 백제 산성 대부분이 궁형임.

 

백제산성의 유형과 특징

백제산성의 특징

백제산성은 백제가 성립된 이후 백제 고지(故地)에 축조된 산성을 말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성시대 백제산성으로 볼 만한 확실한 유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어 백제산성의 전모를 밝히기는 어렵다.

다만 웅진. 사비시대 산성을 통해 그 일단을 확인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웅진. 사비시대의 백제 산성은 크게 보아 석성과 토성이 있다.

 

석성은 시기에 따라 입지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웅진시대까지만 해도 표고 100m 내외의 나지막한 구릉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사비시대가 되면 해발 250-300m의 험산에 산성이 축조된다. 그와 더불어 산성의 규모도 차이를 보인다.

웅진시대 산성은 대체로 500m  내외의 크기를 하고 있는데 비해 사비시대가 되면 남방성(南方城)이 720m,  동방성(東方城)이 1,650m, 등으로 월등히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의 축조에 사용되는 성돌은 가로:세로의 비가 대략 3:2-2:1 정도가 되도록 장방형으로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으며, 밑에서부터 한단한단 수평을 맞추면서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 특징이다.

 

토성은 판축기법으로 성벽을 축조하고 있다. 성벽이 자리할 곳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점토와 사질토를 교대로 쌓아올려 판축하였는데, 이 때 나무기둥 사이의 간격이 2m 이내로 비교적 좁은 것이 특징이다.

 

백제산성의 유형.

백제산성은 조사된 예가 많지 않아 정확한 유형분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산성 분류 방식을 따라 테뫼식산성과 포곡식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테뫼식 산성

 퇴뫼식산성은 산봉(山峰)을 중심으로 7-8부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한 산성을 말한다. 이러한 산성은 멀리서 보면 시루에 흰 띠를 두른 것 같다 하여 시루성(甑城)이라고도 하며,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이 축조되었다 하여 산정식(山頂式)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규모가 작고, 축성 연대가 빠른 것이 특징이다. 장기 농성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기가 어려워 작은 우물이나 저수지 등을 이용한 저수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부여의 성흥산성이 대표적인 예다.

 

 

포곡식 산성

 

포곡식 산성은 산성 안에 계곡을 포함하고 있는 형태를 말한다.

따라서 성벽은 한쪽이 산의 정상부를 지나는데 비해 다른 한쪽은 계곡을 에워싸기 위해 산의 중복(中腹)에 까지 내려와 있다. 성내에 계곡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물이 풍부하고, 규모도 테뫼식 보다 훨씬 크다. 또한 산사면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성내에 많은 건물지가 자리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지형적으로 한쪽이 높고 다른 한쪽이 낮기 때문에 낮은 쪽으로 성내의 모든 물이 몰리게 되어 있는데, 그 때문에 이렇게 낮은 곳에는 저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익산의 오금산성이 대표적인 예다.

 

백제성의 기능과 방어체계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마찬가지로 국경선에서 도성에 이르기까지 산성을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외적의 침임을 대비하였다. 이러한 백제 산성의 방어체계는 크게 보아 3중의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국경선을 따라 배치한 산성이고,

둘째는 국경선에서 도성에 이르는 간선도로를 따라 배치한 산성이며,

셋째는 도성 주변에 일정거리를 두고 배치한 산성이다.

따라서 외적의 침입시 1차적으로 국경선을 따라 배치된 산성에서 침입을 저지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국경선에서 도성에 이르는 간선도로 주변의 산성에서 2차로 저지한다. 여기서도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최후로 도성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산성에 들어가 방어망을 구축한다. 백제는 이렇게 산성을 통해 3중의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방어체계는 삼국이 모두 동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성

왕성은 말 그대로 왕이 거처하는 성곽을 말한다.

왕은 보통 왕궁에 거주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왕성은 곧 왕궁을 에워싼 성곽이란 의미도 된다.

왕성을 궁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도읍지에 시가지 전체를 에워싸는 '성곽(城郭)'이 축조되어 있을 경우, 안에 쌓은 '내성(內城)'이 왕성이 되고 시가지 전체를 에워싼 '외곽성(外郭城)'은 도성이 된다. 고구려의 국내성이나 안학궁성, 신라의 월성 등은 대표적인 삼국시대 왕성이다.

한성시대 백제의 왕성은 풍납동토성이 몽촌토성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웅진. 사비시대의 왕궁이 공산성과 부소산성 안에 있었다면 공산성과 부소산성도 왕성이 된다.

나성

안팎의 이중으로 된 성곽의 바깥 성벽, 자성(子城) 또는 내성(內城), 재성(在城)의 바깥에 있는 넓은 주거지까지 에워싼 이중의 성벽을 말하며 나곽이라고도 한다.

특히 도성의 구조에서 왕궁과 관청을 두른 왕성이나, 일반 주거지를 포용하여 쌓은 성을 나타낸다.

도성

왕성을 포함한 도읍지 전체를 에워싼 성곽을 말한다.

'성곽(城郭)'이란 안쪽에 쌓은 '내성(內城)'과 바깥쪽에 쌓은 '외곽성(外郭城)'을 함께 가르키는 말이다.

내성에는 보통 최고의 권력자가 거처하기 때문에 왕성이라 부르는데 비해 내성 밖 외곽성 안에는 일반관청이나 귀족, 일반 백성들이 거처한다는 점에서 도성에 해당된다.

백제 사비도성의 경우 부여 시가지 전체를 에워싼 나성이 곧 도성이 된다. 도성내에는 많은 사람과 사원, 관청, 기타 여러 가지 시설물들이 자리하기 때문에 일정한 방식으로 편제된다. 중국에서는 바둑판식으로 조방제를 실시한 반면에 백제 사비도성은 5부(部), 5항(巷)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산성

성곽의 위치는 지형에 따라 산봉(山峰), 평지, 평산지(平山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산성은 그 중 산봉에 자리하고 있는 성곽을 말한다. 산성은 평지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조하기 어렵지만 완성되고 난 다음에는 접근이 어렵기 때문에 적을 방어하는 데는 유리하다.

산성을 축조하는데 적절한 지형으로는 고노봉, 산봉, 사모봉, 마안봉 등을 꼽고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의 백제 산성은 사모봉형의 산봉에 자리하고 있다.

 

부소산성(扶蘇山城)

부여읍 쌍북리의 부소산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 토성이다. 성곽이 자리하고 있는 부소산은 해발 106 m로 비교적 나지막한 구릉에 해당되지만 부여읍내의 최북단에 자리하고 있어 읍내 전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성벽은 성내의 산봉(山峰)을 에워싸면서 포곡식으로 축조하였는데, 통일신라시대에 남쪽의 군창지와 반월루를 중심으로 한 테뫼식산성과 서북쪽의 사자루를 중심으로 한 테뫼식산성이 추가로 축조되었다. 아울러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는 군창지를 중심으로 한 테뫼식산성내에 남북방향으로 다시 성벽을 축조하여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백제시대에 축조한 포곡식 성벽의 둘레는 2,495 m 다. 성벽은 점질토와 마사토를 번갈아 가면서 교대로 쌓는 판축식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이 지나갈 구간의 안팎면에 나무기둥을 세운 다음 그 안에다 판축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성벽의 폭은 580-650 cm 이며, 높이는 최대로 460 cm가 확인되었다. 부소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 축조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성내에는 다양한 시설과 유물이 남아 있다. 그 중 백제시대의 시설로는 문지(門址)와 건물지, 치성(雉城), 장대지(將臺址), 그리고 배수시설 등이 있다. 문지는 동문지와 남문지가 확인 되었다. 그 중 남문지는 폭 750 cm 로 비교적 넓은 편이었으며, 전면에 계단이 시설되어 있었다. 부소산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왕궁지의 배후에 왕궁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방어용 산성이라는 주장과 왕성이라는 주장이 있다.

 

 

낙화암에서 바라 본 금강

나성

산성 정상의 군창고 기단석

 

흔적의 실재

- 노성산성 (魯城山城)

논산시 노성면의 노성산(魯城山)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는 포곡식 석성이다.

산성이 자리한 노성산은 해발 348m로 주변에서 가장 높다. 따라서 산성에 오르면 노산시가지를 비롯하여, 연산, 석성 등 주변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은 북벽이 노성산의 정상부를 지나고 있는데 비해 남벽은 거의 중복(中腹)에까지 내려와 있어 북쪽이 좁고 남쪽이 넓은 삼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아울러 전체적으로 성내의 지형은 북고남저(北高南低)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894 m로 고대산성 중에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한다.

성벽은 전체 구간을 석성으로 축조하였는데, 일부 협축식(夾築式)의 흔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구간은 편축식으로 축조하였다. 축성에 사용된 성돌은 일반적인 백제 산성처럼 화강암을 장방형의 형태로 다듬어 한단한단 수평을 맞추면서 바른층 쌓디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밑에서 1m 정도까지는 거의 수직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부터는 5cm 정도씩 안으로 들여쌓기를 하여 완성하였다. 성벽은 붕괴되어 정확한 높이를 알 수 없지만 최대 7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성내에는 동문지, 서문지, 남문지 등의 성문이 있고, 우물 4개소와 장대지 1개소, 그리고 조선시대의 봉수대도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남아있어 처음 축조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논산의 지정학적 조건

논산 동부지역에 산성이 집중되어 있는데, 동부 산지가 끝나는 지점부터 논강평야가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부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논산의 동부지역에서 적의 진입을 저지하지 않으면 부여에 이르기까지, 높은 산이 없어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흔적의 실재

- 황산성 (黃山城)

1985년 7월 19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 56호로 지정되었으며 둘레는 870 m이다.

백제의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에 걸쳐 축성되었고, 해발 246m의 험준한 산자락에 위치한다.

북쪽은 적의 침입이 어려운 지형조건을 이용하여 자연석으로 축성하였고, 나머지 지역에는 활석(滑石)을 사용하였다. 동서남북에 문의 흔적이 있고 군량을 보관했던 군창지도 확인된다.

성 안에서 황산인방(黃山寅方), 대안(大安)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고 백제 특유의 삼족토기(三足土器)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고려시대 와편. 자기편(器片)과 조선시대 백자편(白磁片)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시대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주변의 고분군(古墳群)과 함께 백제 말기 황산벌싸움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전면으로는 황령산성 깃대봉. 산직리산성, 모촌리 산성. 국사봉 등이 성지가 일직선상에 위치하여 신라군 침입을 막는 역할을 맡았고, 뒤편에 있는 이 산성은 본진(本陣)의 백제군 사령부가 있던 중요 성지로 추정된다.

 

흔적의 실재

- 성흥산성(聖興山城)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와 장암면 지토리 사이의 성흥산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석성이다.

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성흥산성은 표고 250m 로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봉(山峰)에 해당된다.

따라서 산성에서는 주변 일대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으며, 특히 멀리 금강 하구까지 한 눈에 감시할 수 있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편축식으로 축조하였다.

즉 성벽의 안팎면을 모두 성돌로 축조한 것이 아니라 바깥쪽면만을 성돌로 축조하였다.

축성에 사용한 성돌은 폭 40-60cm,  높이 30-40cm 정도 되도록 크기와 모양을 일정한 크기로 다믇어 사용하였으며, 쌓아 올릴 때는 한단한단 수평을 맞추면서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성벽의 둘레는 1,200m 이며, 성벽의 높이는 잘 남아 있는 곳에서 4 m에 이른다. 성내에는 동문지, 서문지, 남문지 등 문지 3개소와 우물 1개소, 샘 3개소, 저수시설 1개소, 그리고 군창을 비롯한 다수의 건물지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동문지는 발굴조사 결과 폭이 4.8m 에 이르는 평문식(平門式)의 성문임이 밝혀졌다. 아울러 성내에서는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어 백제시대에 처음 축조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흥산성이 백제 산성이라는 점에서 가림성(加林城)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가림성은 서기 501년에 동성왕(東城王)이 백가를 시켜 축조한 성곽이다.

 

공산성(公山城)

공주시 산성동(山城洞) 공산(公山)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시대 성곽이다.

성곽이 자리하고 있는 공산은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에 있는 봉우리는 해발 110m,  서쪽에 있는 봉우리는 해발 85m 로 동쪽에 있는 봉우리가 약간 더 높다. 성벽은 이 두 봉우리와 그 사이의 계곡을 에워싸면서 포곡식(包谷式)으로 축조 되었다.

현재 성벽은 석성으로 된 구간이 1,925m 이고, 토성으로 된 구간이 735m 에 이르고 있어 전체 둘레는 2,660m 에 이른다. 여기에는 동문지(東門址) 밖에 있는 외성(外城) 467m 와 영은사(靈隱寺) 앞쪽에 있는 지당(池塘)을 에워싸기 위해 조선시대 때 추가로 축조한 석성 43m 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동문지 밖의 외성(外城)을 기준으로 하고, 조선시대 때 새로 축조된 성벽을 제외하면 전체 성벽의 둘레는 2,450m 가 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석성벽은 조선 선조 35년(1602)에서 36년(1603) 사이에 축조된 것이며, 백제 때의 성벽은 토성벽 뿐이다. 토성벽은 동문지 주변에 안팎의 이중으로 남아 있는데, 원래는 바깥쪽 성벽의 형태로 축조되었다가 후대에 안쪽으로 성벽을 들여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바깥쪽에 일정 높이 만큼 돌을 쌓은 다음 그 안쪽에 판축으로 쌓아 올렸는데,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지만 성벽의 폭은 약 5 m 내외를 하고 있다.

성내에는 추정 왕궁지를 비롯한 임류각지, 굴립주 건물지, 저장시설, 지당(池塘)등 많은 백제시대 유적이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와 조선시대의 건물지도 다수 자리하고 있다. 공산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웅진시대 백제 왕도를 지키던 방어용 산서이라는 주장과 왕궁을 에워싸고 있던 왕성이라는 주장이 있다.

 

 

 

 

풍납토성 (風納土城)

사적 제 11호, 서울시 강동구 풍납동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 초기의 토성이다.

한강의 바로 남안(南岸)에 자리하고 있는 장타원형의 평지성으로 1925년에 있었던 대홍수시 성 안에서 청동제 초두, 과대금구 등이 출토되어 일제시대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약 3.5 km에 이르지만 현재는 북벽 300 m, 동벽 1,500 m, 남벽 200 m, 그리고 서북벽 250 m 를 포함하여 약 2,250m 정도만 남아 있다. 성벽은 강변의 평지에 인위적으로 성토하여 완성하였는데, 먼저 성벽의 기저부를 정지한 다음 중심토루를 쌓고, 그 안팎으로 다시 토루를 덧붙여 완성하였다. 기저부에는 점토나 뻘흙을 사용하고 있는데,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고, 하부로 물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중심토루는 삼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이 중심토루에 덧대어 점질토와 사질토를 교대로 쌓아 올려 성벽을 완성하였다. 아울러 뻘흙 사이에는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까는 부엽공법(葉工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성벽은 최대 폭 43 m, 높이 11 m로 우리나라의 토성 중 최대급에 속한다. 이처럼 규모나 축성법에 있어서 최대급에 속하고, 주변에 백제 초기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어 풍남토성은 백제 초기의 중심 거성(據城)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흔적의 실재

- 풍납토성

 

풍납토성은 1925년 한반도을 강타한 대홍수가 지나간 다음 토성 남쪽 성벽에서 한 항아리가 발견되어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나타나게 되었다. 청동제 초두가 발견된 것도 이 때다. 학계에서는 새삼 풍납토성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되었고, 뒤이어 1935년에는 고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별다른 조사 없이 오랫 동안 방치되었던 풍납토성은 1997년에 아파트 공사장에서 백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재차 그 중요성이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성내에서 발견되는 유물의 대부분이 백제 초기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출토 유물을 통해 백제의 건국시기를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기원 전후한 시기까지 소급할 수 있는 단서들이 속속 이어지면서 학계가 크게 흥분하였다. 뿐만 아니라 20평이 넘는 대규모 건물터와 거기에서 기와, 전돌, 주춧돌 등이 발견됨에 따라 이 건물의 성격이 관공서, 혹은 공공 건물일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풍납토성의 축조시기 뿐만 아니라 성격에 대해서도 뜨거운 논쟁이 시작되었다. 조사결과 성벽은 기저부에 점토와 뻘흙을 놓고, 그 위에 유사 판축의 형태로 성벽을 축조한 것이 밝혀졌다. 성벽 기저부의 폭이 40m 에 이르고, 높이도 11 m에 달하는 등 우리나라 최대의 토성으로 밝혀짐에 따라 백제의 건국 및 성장과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大夫)'명 토기를 비롯한 다량의 백제 유물이 출토되면서 풍납토성의 성격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현재 풍납토성은 연차적인 발굴작업과 복원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동진제 초두

초두란 세발로 세워 음식을 데우는 냄비를 말한다

다리받침에는 세마리의 짐승이 조각되어 있고 자루 손잡이에는 용을 조각하겨 놓았다.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형태상으로 중국 동진제 초두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에 해당된다.

삼족기(세발토기)

무덤의 껴묻거리로 많이 쓰인 것으로 제사 의식등에 썼던 특수 용기로 추정.

중국 육조 문화의 산물로서 백제-중국 문화교류의 산 증거이다.

벼루

백제 귀족들의 문화 생활을 증명해 주는 유물로 한성 백제시기에는 직사각형의 벼루가 유행했으나 사비시대에 오면 둥그런 형태에 받침다리가 많이 있는 것이 유행했다.

- 안내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