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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전시실. 백제의 군사활동. 백제군사박물관. 논산시(論山市) 본문
제 1전시실. 백제의 군사활동. 백제군사박물관.
논산시(論山市). 충남(忠南)
칠지도
말탄 무사가 그려진 병 - 서천 여리미 석곽묘
말구류, 발걸이 - 천안 용원리 9호 석곽묘
웅진성
쇠창 - 천안 용원리 석곽묘
화살통 장식 - 공주 송산리
부소산성
낫 - 부소산성
갑주 - 부소산성
삼국의 군사편제
신라의 군사편제
신라는 처음에 왕경 6부(部)의 소속원을 군인으로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을 통해 왕경을 수비하도록 하였다가 삼국간의 충돌이 격화되는 진흥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군사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왕경 주위의 6개부대를 통합하여 대당(大幢)을 편성하고, 다시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상주정(上州停), 신주정(新州停), 비열홀정(比列忽停), 실직정(悉直停), 하주정(下州停)을 설치하여 모두 6정이 편성되었다.
모두가 주치소(州治所)에 배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대당을 제외한 나머지 5개의 정(停)은 모두 지방민을 징발하여 편성하였다. 널리 알려진 화랑제도는 이러한 6정 군단의 보충을 목적으로 한 군사조직이었다. 신라의 군사조직은 통일 후 중앙군으로서의 9서당과 지방군으로서의 10정으로 재편되었다.
고구려의 군사편제
고구려의 군사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앙군은 수도 5부(部)에 각 부마다 1천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말객(末客)이 지휘하고, 이들 5부의 중앙군을 대모달(大模達)이 총괄 지휘하였다. 지방군은 지방행정 조직과 짝을 이루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지방행정조직이 욕살, 처려근지, 누초를 지방관으로 하는 3단계 구조였던 만큼 군사조직 역시 이러한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편, 고구려, 군사의 병종은 크게 보아 육군과 수군이 있었다. 육군은 다시 기병과 보병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고분벽화에 보면 행렬의 좌우에 기병이 서고 그 안에 보병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전투는 기병과 보병이 합동작전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병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 활, 긴 창, 칼을 주 무기로 사용한 반면에 보병은 활, 칼, 짧은 창, 도끼, 갈고리를 주 무기로 하였다. 수군은 고구려가 낙랑지역을 차지한 후 이 지역의 해상세력을 바탕으로 편성한 듯한데, 광개토대왕 때에는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백제의 군사편제
백제의 군사조직과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제는 수도는 5부(部)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5부에는 달솔(達率)이 지휘하는 각 500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모두 2,500 명의 군사가 상주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은 수도 방위와 경찰의 임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지방을 5방(方)으로 나누고, 다시 그 아래에 37군(郡)과 200성(城)을 편제하였다. 방에는 방령(方領), 군에는 군장(郡將), 성에는 도사(성주)가 파견되어 관할 하였다. 방은 6-7개의 군(郡), 많을 때는 10개의 군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각 방에는 석성으로 된 방성(方城)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울러 방에는 700인 이상 1,200명 이하의 군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백제 지방군의 핵심은 5방 이었다.
지방군의 핵심적인 병력은 상비병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일반 대다수의 병력은 일반민을 동원하여 충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통 15세이상 60세 이하의 일반민들은 모두 군역의 의무가 부과되어 있었으며, 복무기간은 3년이 원칙이었다.
- 안내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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