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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박물관. 문화유물전시관. 문의문화재단지. 청원군(淸原郡) 본문
동굴박물관. 문화유물전시관. 문의문화재단지.
청원군(淸原郡). 충북(忠北)
두루봉 동굴 소개
두루봉 동굴은 충북 청원군 노현리 시남마을 동남쪽의 석회암 채굴장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으로,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발굴 조사하여 2굴, 9굴, 15굴, 새굴, 처녀굴에서 많은 유물들을 찾아냈다. 여러 굴로 이루어진 두루봉 동굴 유적은 각기 다른 종류의 구석기 문화 자료들이 발굴되어 아시아 구석기문화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의 주인공인 사람과 함께, 생활을 영위하며 만든 석기, 그리고 석기를 이용하여 잡은 많은 멸종된 짐승뼈 화석과 뼈연모 등이 모두 한 유적에서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되며, 청원지역에서 발굴된 최초의 구석기 유적으로 금강을 따라 형성된 구석기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두루봉 동굴 흥수굴 어귀
2굴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발굴조사한 결과 6개의 석회마루층 밑에 있는 문화층(7층)에서 3문 7강 15목 28과 37속 46종의 동물상과 3아강 10목 13과 12종의 식물상이 밝혀졌다. 쌍코뿔이. 크로쿠타 크로쿠타. 하이에나. 큰원숭이 등의 멸종된 짐승이 발굴되어, 꽃가루 분석과 함꼐 더운 시기에 있었던 문화로 확인되었다. 굴에서는 많은 양의 뼈연모를 비롯하여화덕자리가 발굴되었으며, 5명의 사람이 약 2,000일 정도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9굴
2개의 문화층을 발굴하는데 노란 흙 층은 전기 구석기 층으로서 4종의 동물화석이 출토되었고, 붉은 흙 층은 중기 구석기 층으로서 33종의 동물화석이 출토되었다.
석기는 긁개와 밀개가 많고 인구 고고학의 방법으로 따져보면 5사람이 노란 흙 층에서 51일, 붉은 흙 층에서 138일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5굴
집터가 발굴되었는데, 길쭉한 석회석을 한 줄의 담돌로 하여 만들었으며 크기는 2.9평 정도로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유물은 석영으로 만든 조리용 연모가 많이 출토되었다.
새굴
새굴은 두루봉 정상에서 찾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옛 코끼리의 상아를 비롯하여 20종의 동물화서기 출토되었는데 특히 사슴뿔을 갈아서 만든 치레걸이 (목걸이) 2점도 발견되었다. 이는 당시 사슴 숭배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처녀굴
사라의 손이 닿지 않은 굴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쌍코뿔이의 아래턱과 완전한 개 개체의 동굴곰 뼈대가 사슴뿔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동쪽을 향하여 놓인 채 발견되어 의식 집행지로 해석하고 있다.
흥수굴
완전한 사람뼈와 석기, 동물화석이 발굴된 가장 이상적인 구석기 유적지이다. 제보자 '김흥수'씨의 뜻을 기리고자 국내 처음으로 유적지에 사람 이름을 딴 '흥수굴'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굴에서 발견된 2개체의 사람뼈와 여러 층위에서 발굴된 많은수의 전형적인 구석기 유물은 우리나라 석기발달과 구석기학의 체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두루봉 동굴 출토유물
쌍코뿔이
두루봉 처녀굴에서 쌍코뿔이뼈가 출토 되었다. 마지막 빙하기가 시작되기 전 기후가 따뜻했을 때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갈비뼈와 등뼈에서 자른 자국 (Cut-Mark)이 확인되어 쌍코뿔이를 잡은뒤 도살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쌍코뿔이 아래턱
자른자국이 있는 쌍코뿔이뼈
쌍코뿔이 복원 모습
동굴곰
두루봉 처녀굴에서 큰 꽃사슴뿔과 함께 출토되었으며, 곰뼈와 사슴뼈를 의도적으로 배치한 듯 발견되었다. 이것은 당시에 두루봉에서 의식행위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연대설정의 기준이 되는 표준화석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굴곰 출토모습
동굴곰 머리뼈
동굴곰 복원모습
동굴유적
구석기 사람의 보금자리, 동굴
건축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구석기인들에게 동굴은 따뜻한 피신처였으며, 비바람을 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구석기 사람들에겐 소중한 집터였다.
동굴은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여, 겨울에는 바깥보다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였다. 또 눈보라와 비바람. 사나운 짐승을 피하기에도 좋았다.
동굴 안 한가운데에는 대개 땅을 파거나 돌을 쌓아 화덕을 만들었고 화덕 주위에 둘러앉아 차가운 몸을 녹이고 동물 살코기를 익혀 먹었다.
발굴된 동물 대부분에서 사슴. 곰. 멧돼지들의 뼈가 발견되었다.
한국에서 구석기인들의 주거지로는 청원군의 두루봉동굴. 충북 제천시의 점말동굴, 제주 북제주군의 빌레못동굴 등의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이런 동굴에서는 그들의 생활. 예술. 종교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었다.
구석기인들의 보금자리 - 동굴
건축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구석기인에게 동굴은 따뜻한 피신처였으며 소중한 집터였다.
구석기인의 주거지 - 막집
구석기인의 대표적인 주거지인 동굴과 더불어 막집은 구석기인의 대표적인 주거지였다. 후에 움집으로 발달하였다.
구석기인의 일터
구석기시대에는 동굴생활이나 움집 (막집)생활을 하였으며 수려이나 채집을 통해서 삶을 살아갔다.
사냥하는 구석기인
구석기시대에는 돌 등을 연마하여 만든 창이나 도끼를 이용해서 사냥을 하였다.
구석기 시대의 장묘문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묘문화인 매장문화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시신을 얕게 묻고 시신의 머리방향을 동쪽으로 하는 특징을 보였다.
흥수아이
1983년 흥수굴에서 발견된 흥수아이는 발굴보고에 따르면, 편편한 석회암 낙반석 위에 누워 있었는데 일부러 시신을 바로 펴놓은 후 고운 흙을 뿌렸다는 사실이 관찰 되었다.
상당히 높은 지대인 석회암동굴에 국화꽃이 자생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국화꽃은 장례를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곳에서 꺾어 왔다는 추정이다. 이것으로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에도 매장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흥수아이 발굴모습
흥수아이 매장 모식도
흥수아이 복원모습
흥수아이 1호 사람은 다섯 살 정도로, 머리크기는 1,200~1,300cc, 키는 110~120cm 정도로 헤아려 진다. 흥수아이의 머리뼈는 좁고 길며, 특히 윗머리 뼈의 굽은 길이는 긴 가운형 얼굴이다. 약 4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흥수아이는 머리뼈를 측정한 값의 결과로 보면, 현대인과 선사인의 특징을 함께 갖고 있다.
흥수아이를 통해 본 구석기 장례문화
흥수아이를 통해 구석기인들의 장례문화를 엿볼 수 있다. 흥수아이 발굴지에서는 뚜렷한 매장 흔적이 발견되는데, 납작한 석회석 판자 돌을 놓고 흙을 덮은 뒤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한 것이다. 시신을 아무 곳에나 아무렇게 방치하거나 버린게 아니라, 나름대로 형식을 갖추어 매장했다는 증거이다. 또한 흥수아이 주변 흙을 채취하여 분석해 보니 가슴뼈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많은양의 꽃가루가 나왔다.
특히 국화과 꽃의 꽃가루가 많았는데, 이를 통해 어린아이의 매장 과정에 국화꽃을 사용한 모종의 장례의식이 치러졌다는 것과 국화꽃이 만개한 가을쯤에 매장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 구석기의 장례문화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흥수아이의 발견으로 죽은 이를 애도하기 위한 장례 절차가 치뤄졌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처럼 흥수아이를 통해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그냥 골짜기 깊숙한 곳에 던져두지 않고, 죽은 사람을 위해 꽃을 바치며 형식을 갖추어 애도할 줄도 알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식 잃은 슬픔은시대와 지역에 상관없이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인류의 이동경로 (추정)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탄생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것인지 아니면 세계 곳곳에 자리잡고 있던 호모 에렉투스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다. 현재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위 지도는 아프리카 단일 기원설에 근거하여 현생 인류의 전파 과정을 추정해 본 것이다.
10만 년 전쯤에 아프리카 남부에서 탄생한 현생 인류는 발달한 지능과 뛰어난 도구 제작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1만년 전쯤에 전 세계로 퍼져 살게 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청남대 주변 유물
강외 쌍청리 석조불상
청원군 강외면 쌍철이 속칭 봉도리 마을 이상현씨집 뒷곁에 있던 불상으로 1997년 문화재단지로 옮겼다.
두부(頭部)가 결손되었으며,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굵은 옷주름을 이루며 양팔을 지나 발목까지 유려하게 흘러 내렸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95cm, 어깨폭 34cm 로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선사시대의 청원군
금강의 본류와 여러갈래의 지류가 유유히 흐르고 산과 평야가 적당히 조화를 이룬 청원군은 선사시대의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은 자연환경을 이루었다. 오늘날 청원군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선사유적들이 당시의 생활모습은 물론 자연환경을 잘 알려준다.
청원군에는 홍적세인 전기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오면서 곳곳에 많은 유적을 오늘날까지 남기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유적인 문의면 노현리의 두루봉동굴은 석회암지대의 천연동굴로서 2굴, 9굴, 15굴, 새굴, 처녀굴, 흥수굴 등이 발굴조사되었는데, 많은 동굴 화석과 함께 뗀석기와 뼈연모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동굴곰과 코끼리의 상아도 발견되어 그 시기의 기후가 따뜻하고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적당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미호천변의 여러 지역에서 구석기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들이 발견되어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석기 문화의 실체가 밝혀지고 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움집을 짓고 살았던 쌍청리 유적은 구릉지대로 생활터전을 옮겨 농사짓기를 서서히 준비하였음을 보여준다. 빗살무늬토기조각이 발견된 지역을 발굴조사한 결과, 이곳에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우고 갈대로 벽과 지붕을 막았던 집터가 드러났다. 이 집터의 형태는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돌출부를 갖춘 형태도 보여 특이하며, 출토된 유물 가운데 돌보습, 갈판, 갈돌, 반월형석도 등 주로 농사짓기와 관련이 깊은 것이 많은 반면에 물고기잡이와 관련된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중부지역 신석기문화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청동기 시대에는 청원군의 모든 지역에서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농사일을 하면서 살았으므로 그 유적도 청원군 지역에서 분포하는데, 특히 미호천 주변의 구릉지에서는 집터와 함께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돌도끼와 흠자귀, 반달돌칼들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문의면 가호리 고인돌, 북일면 비중리 석관묘, 강내면 적석총을 비롯하여 많은 무덤유적들은 당시에 매장풍습이 일반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석굴
흥수아이 (두루봉 동굴 출토)
삼국. 통일신라시대의 청원군
청원군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해 있었다. 이 시기에는 농경시대의 기본적 특징이 되는 공동취락을 형성하였으며, 마을의 방어를 위하여 토성을 쌓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신분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자기의 전문직업을 갖게 되었다. 청원군지역에는 마한에 속하였던 하나의 부족국가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 나라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시대 초기의 사람들은 아직 움집을 짓고 살았으나, 점차 발전되어 난방을 위한 온돌을 만들기도 하였다.
삼국의 정립이후에 청원군은 백제에 속하였다가 대략 6세기부터는 신라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초기에 청원군지역은 상당현(上黨顯)이 되었으며, 그후에 낭성(娘城) 또는 낭자곡성(娘子谷城), 낭비성(娘臂城)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다. 한편 문의지역으 일모산군(一牟山郡)이라 하여 역시 백제에 속해 있었다. 이 때 청원군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이 되는 한편 교통상의 요지였으므로, 금강유역을 차지하고 한강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청원군에 있는 양성산성, 낭성산성, 구라산성, 낭비성, 병마산성, 동림산성, 복두산성, 목령산성 등과 부용면 지역의 10여개 산성은 쟁투가 심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적들이다.
이밖에 불교문화도 유입되어 비중리 일광삼존불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신라에 의하여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후, 신라 신문왕(神文王) 5년 (685)에는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고 경덕왕 (景德王) 16년 (757)에 서원경으로 승격되었으며, 문의지역은 연산군(燕山郡)으로 개칭되었다.
통일신라시대는 삼국의 문화가 종합되어 한단계 발전된 문화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청원군에는 이 시기에 세워진 안심사(安心寺)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돌널무덤들이 문의면 지역에서 발굴되기도 하였다.
일본 동대사의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촌락문서는 바로 통일신라시대 청원군지역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문서인데, 이에 의하면 서원경에서는 마을의 둘레, 연호의 수, 인구, 소와 말의 수, 논과 밭의 면적, 뽕나무와 잦나무, 추자나무의 그루수, 인구의 감소와 경제자원의 변동사항 등을 3년마다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청원군
청원군은 고려 태조 (太祖) 23년 (940)에 서원경에서 청주(淸州)로 지명이 바뀌었다. 그리고 성종(成宗) 2년 (983)에 전국을 12목(牧)으로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청주에 목을 두어 호서지방의 중요한 행정중심지가 되었으며, 성종 14년 (995)에는 전절군 (全節軍)으로 개칭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였다. 현종 (顯宗) 3년 (1012) 에는 이를 폐하고 안무사(按撫使)을 두었다가, 현종 9년 (1018)에 다시 전국에 8목 (牧)을 둘 때 청원군 지역은 그중의 하나인 청주목(淸州牧)이 되었다. 그리고 문의지역은 연산군을 문의현(文義縣)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정치제도와 문화가 계속적으로 발전하여 국가의 중요한 통신교통망이라 할 수 있는 봉수제도와 역참제도가 완비되었다. 이에 따라 청원군 지역에는 소이산()과 저산()에 봉수대가 설치되었고, 장지역(), 저산역(), 덕유역(), 율봉역(), 금사역() 등의 교통망이 구축되어 우리나라 중부지역의 핵심적인 교통요지가 되었다.
고려시대는 각 분야의 문화가 고르게 발전된 시대인데 불교문화도 특히 발전하여 청원군지역에도 많은 문화재가 남아있다. 보물 제 5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계산리 5층석탑을 비롯하여 동화사 비로사나불좌상, 괴정리 석불입상, 탑리 비로사나불좌상 등이 모두 고려초기의 작품들이며, 곳곳에서 많은 절터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월리사 ()와 현암사()도 고려시대에 처음 세워져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청원군
조선이 건국된 후 청원군이 속하였던 양광도()는 태조 4년 (1395)에 충청도로 개칭되었으나 청주목()은 그대로 존속되었고, 충주목에 관찰사()를 두었다 세종 31년 (1449)에는 관찰사로서 판목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이를 폐지하고, 세조() 때 진()을 두어 청천현()과 주안향()을 속현으로 삼았다. 충청도는 충주진. 청주진을 충청좌도라 하였는데 선조 24년 (1591)에는 해미()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영을 청주로 옮겼다. 청주는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연산군 이후 목에서 현으로 강등되는 변고를 여러차례 겪기도 하였다. 문의 지역은 문의현 으로서 그대로 존치되었다. 임진왜란때는 중봉 조헌()선생을 중심으로 한 청원군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청사에 빛나는 큰 공을 세웠다. 청원군에는 조선시대의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문의 향교가 현존하고 있으며 많은 서원들이 아직 남아 있어 선현들에 대한 향사를 계속한다.
조선시대의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문산관()이 전국적으로 매우 드물게 원형이 잘 남아 있다. 그리고 안심사와 월리사 대웅전 그리고 이항희, 유계화가옥 등 많은 고건축물이 있으며, 국보 제 297호인 안심사 괘불()을 청원구의 유일한 국보로서 대표적인 불교문화재라 할 수 있다. 또한 영조대왕의 태실()은 가봉의궤()와 함께 전해지고 있어 조선시대 태실의 축조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청원군의 유일한 국보 문화재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 271번지에 소재한 대한불교 조계종 안심사() 영산전()내의 목제하에 봉안되어 있는 영산회 괘불탱은 청원군에서 유일하게 국보 제 297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이 괘불은 1폭()으로 조선 효종 3년(서기 1652년, 순치 9년)에 제작된 불화로 길이 726cm, 폭 472cm 이다.
석가불()이 법화경()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로 구도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이대보살 (), 심사대보살(), 사천왕상(), 제석() 과 범천(), 용녀()와 용왕() 등 신중()들과 십방제불()로 둘러싼 군도() 형식이다.
이 괘불은 윗부분 일부에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학 색조도 거의 원상을 간직하고 있다.
불화의 하단에는 <순치 9년 임진 4월일() 이라는 먹글씨()가 있어 1652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고 주상전하수만세(), 왕비전하수제년(), 세자전하수천추()가 표기되어 있어 왕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다.
안심사에서는 해마다 <부처님 오신날과 중요행사가 있을 경우 괘불을 걸어 공개하고 있다.
옛 문산관
문의 향교
안심사
월리사
근대. 현대의 청원군
청원군은 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재편성하면서 충청북도 청주군이 되었으며, 1907년에 다시 개편하여 주안면, 덕평면, 수신면을 충남에 각각 넘겨주어 23개면이 되었다. 1908년에는 관찰부가 청주로 이전되어 충북의 도청소재지로서 행정 문화으 중심지가 되었고, 1914년에 행정구역 재조정에 따라 청천면을 괴산군에 넘겨주고, 청주. 서주. 북일. 북이. 미원. 낭성. 남일. 남이. 강서. 강내. 강외. 옥산. 오창. 가덕. 용흥. 부용. 양성. 현도의 18개면 343개리로 개편되었다.
1930년 양성면과 용흥면을 합하여 문의면으로 고치고, 1946년 6월에 청주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청원군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에도 수차례 조정을 거쳐 현재는 낭성. 미원. 가덕. 남일. 남이. 문의. 현도. 부용. 강내. 강외. 옥산. 오창. 북이. 북일 등 14면과 251개리를 관할하고 있다.
청원에서는 일제의 침략시기에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04년경부터 시작된 의병전쟁은 1907년에 청주진위대가 해산당한 이후 더욱 활기를 띠었다. 한봉수 의병장은 한말의병전쟁에서 3.1 운동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중의 필두에 선 의암 손병희 선생을 비롯하여 권병덕. 신석구. 신흥식. 정춘수 선생등이 청원군 출신이며, 이밖에 김제환. 김규식. 조자아. 신채호 선생등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시다 순국하시었다. 해방이후 청원군은 중부권의 핵심지역으로서 농업과 산업, 교육. 문화가 균형되게 발전하였으며, 대청댐의 건설로 아름다운 호반을 갖게 되고 문의 문화재단지와 어우러진 관광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청주공항이 건설되고, 경부고속철도 오송역과 오창과학산업단지. 오송보건의료과학단지가 조성되고 있어 지방자치시대 이후에도 밝은 미래가 전망되는 살기좋은 고장이다.
- 안내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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