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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박물관. 문화유물전시관. 문의문화재단지. 청원군(淸原郡) 본문
기와 박물관. 문화유물전시관. 문의문화재단지. 청원군(淸原郡). 충북
경주 안압지 출토 녹유귀면기와 (綠釉鬼面瓦)
괴수과 같은 귀신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조각한 원두방형의 기와이다.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에는 부릅뜬 눈과 들창코, 길게 찢어진 입에는 혀가 나와 있으며, 송곳니가 날카롭게 뻗쳐 있고 이마에는 굴곡된 뿔이 돋아 있는 무서운 형상이다.
귀면기와는 원래 수면(獸面)을 무섭게 의장화하여 악귀의 침입을 방지 하려는 벽사의 상징으로 목조건물의 네 귀에 부착하였다.
- 안내문에서 -
본 기와 전시는
청원군 옥산면 출신인 재단법인 간송문화재단
고 권태성 씨가 본인 소유의 와당(瓦當) 및 전류(塼類)
774점을 군에 기증한 것을 비롯하여
군 자체 수집 및 부용면 부강리 전상복 씨
문의면 괴곡리 박승인 씨 등이
기증한 기와를 한 자리에 모아 마련되었습니다.
기와의유래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로로 모골 (模骨) 및 와범(瓦范)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에 가마속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낸 건축부재이다.
목조건축의 지붕에는 원래 이엉이나 볏짚. 나무껍질 같은 식물성 부재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내구력(耐久力)이 약하여 자주 교체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방수효과나 강도가 높아 반영구적인 점토소성품 (粘土燒成品)으로서 기와가 출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목조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여 지붕을 이는 풍습은 고대 동양건축의 중요한 특색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기원은 다른 고대사 분야와 마찬가지로 쉽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중국에서 기와가 처음으로 제작되어 사용된 시기가 서주(西周)초기로 알려짐에 따라 약 3,0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한의 무제(武帝)가 설치한 낙랑군에 의하여 전파되어 기원전부터 우리나라의 북부지방에 새로운 목조 기와집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삼국시대부터 기와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변천에 변천을 거듭하여 왔는데, 지붕에 사용되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나 명칭이 각각 다르고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 안내문에서 -
기와의 종류와 사용처
기와의 제작방법
수키와 제작방법
기와의 생산은 일정한 장소에 조와소 (造瓦所. 기와를 제작하는 장소 또는 공장)가 설치된 다음에 점토의 채취와 수비, 기와 성형, 연료 채취, 기와 소성, 가마 수리, 제품 운반 등의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루어 진다.
기와의 제작에는 점토판 제작, 원통 기와의 성형과 분할, 막새접합, 건조 등의 세분된 작업과정이 뒤따르게 되는데,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남겨진 흔적으로 당시의 제작기법을 파악할 수 있다.
암. 수키와의 제작틀은 모골(模骨) 또는 형(形)이라고 부른다. 모골의 형태는 암.수키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분할하게 되는 원통기와는 대부분 회전대 위에 새겨진 모골에 마포를 씌우고 점토판을 덧붙여 성형하게 되는데, 그 크기나 형태 및 분할기법은 암수키와가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모골
2. 마포 씌우기
3. 점토판 덧씌우기
4. 원통기와의 성형
5. 원통기와 들어내기
6. 마포제거
7. 수키와 분할
암키와 제작방법
1. 모골
2. 마포 씌우기
3. 점토판 덧씌우기
4. 원통기와의 성형
5. 모골 제거
6. 마포 제거
7. 암키와분할 (4매)
백제 기와 (百濟瓦)
백제의 기와는 암. 수키와가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연꽃무늬가 장식된 수막새와 서까래기와도 출토되고 있다.
암키와의 선행형식인 큰암키와의 치미, 마루기와 등이 약간씩 제작되어 사용되고 있다.
백제는 도읍지의 위치에 따라 한성 도읍기 (?~ 475년). 웅진 도읍기 (477~538년), 사비 도읍기 (538~660년)로 나뉘어져 그 역사와 문화도 많은 변천을 겪게 되는데, 기와 역시 이와 궤를 같이 한다.
한성도읍기의 백제기와는 서울 몽촌토성과 풍납동토성, 그리고 석촌동 4호분에서 약간씩 출토되고 있으며, 서울의 광장동이나 삼성동(三城洞)에서 연꽃무늬가 장식된 수막새가 발견되었으나 백제초기의 기와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문주왕 원년 (475년)에 천도함으로써 개막된 웅진도읍기의 기와가 출토되고 있는 유적은 공산성, 대통사터, 서혈사터, 봉왕동 절터 등인데 공산성과 서혈사터 이외에는 발굴조사를 거치지 않아 기와의 출토사례가 적은 편이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사비로 천도한 것은 성왕 16년 (538년)으로 백제의 문화가 매우 융성하기 시작하는 시기로 도성의 안팎에 많은 사원과 산성이 조영됨에 따라 기와의 제작도 더욱 본격화된다. 기와가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는 곳은 사원터와 궁성터 및 산성터이며 암.수키와를 비롯하여 수막새와 서까래기와. 마루기와 등 여러 종류의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기와는 연꽃무늬 수막새이다
연꽃무의 수막새 (백제. 부여 정암리 가마터 출토)
수막새 세부 명칭도
수막새의 각부 명칭 (各部名稱)
용마루의 기와
통일신라 기와
통일신라 초기으 우리나라의 와전사()에 있어서 크나큰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통일신라의 기와는 각각 특색있게 전개되어 온 삼국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성당문화()의 외연적인 자극에 따라 유래없는 복합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로써 통일신라 직후부터 새로운 와전형이 개발되어 동아고와사상() 최고 수준의 기와문화가 형성된다.
그리고 삼국시대에 거의 제작되지 않던 암막새와 마루기와, 그리고 보상화무늬 전돌 등이 새로 출현하게 됨에 따라 비로소 와전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기와의 종류도 다양하고 시문단위도 전대()에 유행된 연꽃무늬에 국한되지 않고 보상화무늬, 당초무늬, 금수무늬 등이 다채롭게 채용되어 그 형식적인 변화가 매우 풍부하게 전개되었다.
이같은 경향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사원과 궁전 건축이 본격적으로 건립되는 등 국가적인 조영사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기와가 대량 생산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고려기와
우리나라의 와전()은 고려시대에 또 한번의 변혁을 가져왔다.
고려초기에는 통일신라의 전통과 고구려적인 요소를 지닌 막새형을 계승하여 제법 화려하고 세련된 기와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중기부터는 취두나 용두와 같은 새로운 기와가 출현하게 되며, 막새의 시문단위도 연꽃무늬나 당초무늬에서 벗어나 귀목무늬()의 일색으로 변화하게 된다.
고려후기에는 범자()가 막새에 새겨지게 되며 암막새의 드림새가 밑으로 늘어져 커지게 되는 새로운 모습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기본 기와인 암. 수키와와 막새. 그리고 마루기와와 약간의 서까래기와가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그리고 고려중기 이후부터는 치미와 귀면기와 대신에 취두와 용두가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건축의장의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유단식과 무단식이 함께 제작되었던 암. 수키와의 표면에는 평행선. 문살. 우상() 등의 다양한 무늬가 새겨졌으나 우상무늬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우상무늬는 생선뼈무늬()로 불리기도 하는데, 생선뼈 무늬가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빗살무늬 토기의 시문명칭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조선기와
조선시대 기와는 장식성이나 미관성이 약화된 반면 기능성이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암. 수막새는 직각이 아닌 둔각 상태로 암.수키와와 접합되어 있고, 드림새가 밑으로 종타원형이나 역삼각형으로 변형 제작되어 비흘림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 조선시대 막새는 그 하단부가 밑으로 늘어져 전통적인 막새형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수막새는 원형에서 종타원형으로, 암막새는 장방형에서 역삼각형으로 변형되고 있다. 막새에는 연꽃. 초화. 새, 귀면. 용 등의 여러 문양과 문자가 새겨졌는데 기와의 제작기법과 함께 문양도 퇴락의 기미가 엿보인다.
한편 조선시대 막새에는 길상문구와 함께 기년명과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 눈에 띈다. 서울의 창경궁에서는 '수()'자와 '희()'자가 새겨진 수막새가 수집되었고, 각지의 절터에서느 기년명과 기와 생산에 도움을 준 시주자의 이름을 새긴 암막새가 출토되고 있다.
막새에 시주자의 이름을 새기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성행한 번와풍습() 의 하나로 당시 사원경제의 퇴락과 이를 타개하려는 사찰의 고육지책과 구복()에 바탕을 둔 백성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사람얼굴무늬 수막새
이 기와는 고신라시대의 것으로 영묘사터에서 수집되었는데,살짝 웃는 모습에 눈. 코. 입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이채롭다.
이 막새는 사람 얼굴이 음각된 목재틀에서 찍어낸 것으로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뒷면에 수키와를 부착시킨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실제로 지붕에 이어져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사람얼굴이 장식된 기와는 황룡사터에서 출토한 치미()에서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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