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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行宮) 안내. 광주시(廣州市) 본문

나라안 나들이/경기도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行宮) 안내. 광주시(廣州市)

세계속으로 2015. 10. 15. 16:00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行宮) 안내. 광주시(廣州市). 경기도()

 

남한산성은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성벽을 구축하여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함락되지 않은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남한산성 전체는 약 12km 에 달하고 면적은 212만 이다. 남한산성의 본성은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기초로 하여 인조2년 (1624)에서 인조4년(1626)까지 대대적으로 축성되었다. 남한산성행궁 역시 축성과 함께 인조3년(1625) 상궐과 하궐이 건립되었다.

 

 


 

지정명칭  남한산성행궁 Emergency Temporary Palace in Namhansanseong

종목  사적 제 480호

지정일  2007년 6월 8일

 

행궁이란 왕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도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행궁은 20여개로 전 시기에 걸쳐 조성되고 이용되었는데, 능행, 전란, 휴양 등을 목적으로 한다. 이중 남한산성행궁. 북한산성행궁, 강화행궁 등이 전란을 대비하여 건립한 행궁이다. 인조14년(1636)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 조선왕조는 숙종37년(1711) 좌전과 우실을 건립하는 것을 비롯하여, 남한산성의 시설물들을 보수하고 관리, 증축하는데, 이는 조선의 배도이자 보장처로서 역할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으며, 특히 정조는 남한산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남한산성의 사대문의 이름을 짓고, 과거시험을 시행하였다.  또한 승군의 진법과 매화포와 같은 무기를 확인하고, 야간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남한산성의 관리상태를 점검하였다. 이후 정조19년(1795) 광주부와 수어청의 이원적 관리체계를 일원화하여 광주유수부로 승격하고, 서울 외곽의 방어를 책임지는 군사요충지로 자리매김하였다.

 


 

한남루(漢南樓)

한남루는 행궁의 정문으로 정조22년(1798)에 광주 유수 홍억이 건립한 누문이다.

궁궐의 제도는 삼문이라 하여 정전까지 3개의 문을 거쳐 들어가는 것이 법도인데, 남한산성행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그 전에는 외삼문과 중문만이 있던 것을 한남루를 대문으로 세우며 '삼문삼조'의 법도를 완성하였다. <남한지>의 <한남루기>에 보면 '한남루'의 뜻이 나타나 있는데, 한강 남쪽 성진(城鎭)의 누대라고 한다. 한남루의 정면기둥과 후면기둥에 8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한남루 주련 이야기

주련(柱聯)이란 기둥마다 시구를 연결하여 걸었다는 뜻이다. 좋은글귀나 남에게 자랑할 내용을 써서 붙이거나 얇은 편지에 새겨 걸어두는 것으로 주련의 시구를 읽어보면 당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한 성을 지킴에 용과 호랑이의 비법으로 백리 지역을 지키며 맹수와 같은 용사를 보도다

훌륭한 관리는 임금님의 은덕을 널리 퍼트리고 대장군은 아랫사람을 위엄과 인의로 다스리네

이땅에서 잠업(蠶業)과 보장(保障)을 겸하지만 한가한 날에는 노래하며 투호놀이도 한다네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항상 그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어다.

 


 

외행전(外行殿)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정당(正堂)이라고도 하였다. 외행전은 내행전과 함께 인조3년(1625) 남한산성 수축을 시작한 이듬해에 시작하여 인조4년(1626)에 준공하였다. 규모는 정면 7칸에 측면 4칸으로 상궐의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 건물이지만 바닥 면적이 내행전은 167 인 반면 외행전은 142 로 약간 작다. 기둥 상부의 공포는 내행전에서는 새 날개처럼 생긴 이익공 부재를 사용한 반면 외행전은 끝부분을 둥그렇게 만든 물익공으로 하였는데 이는 상궐보다 위계를 낮추기 위함이다.

외행전은 2010년에 중건한 것인데 발굴조사과정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확인되어 건물지와 와적지 일부를 현장 보존하여 전시하였다.

 

외행전 주련 이야기

<남한지>에 '하궐 전(외행전) 마루의 앞 기둥에는 세쌍의 시를 걸었으니 다음과 같다.' 하여 주련의 시구가 적혀있다.

 

성대가 처음으로 삼대의 풍속으로 돌아와

대궐 숲에 오래 머무니 만년의 봄 이로다

봉은 성인의 작은 마음속에 있고

백성은 모두 큰 화합 가운데 기운이 있도다

만민이 노래하고 춤추는 태평한 세상의 평화로운 풍경이요

천리에 뻗친 산과 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좋은 땅에 봄이 온 것 같구나

 


 

내행전(內行殿)

내행전은 임금의 침전으로 규모는 정면 7칸에 측면 4칸으로 전체 28칸 건물이다. 중앙 3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고, 양 옆은 온돌방과 마루방으로 각각 되어 있다. 대청을 제외한 3면으로 퇴가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임금이 머무는 동안 수행원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남한산성행궁의 내행전은 임금의 안위를 보필하기 위해 담으로 둘러쌓았으며, 부속시설도 담 밖으로 설치하는 등 폐쇄적인 배치구조이다.

내행전의 기둥 상부의 공포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부재를 두개 겹쳐 쌓은 이익공(二翼工) 형식으로 행궁 내 건물 중 가장 격식이 높다. 팔작지붕의 추녀마루에는 잡상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행전 잡상(雜像)

 

내행전 익공(翼工)

 

내행전 마루

 

내행전 왕의 방

 


 

일장각(日長閣)

일장각은 하궐 왼편에 있는 관아건물로 광주 유수가 사용한 8칸 규모의 건물이다. '일장각'은 청량산의 또 다른 이름인 '일장산'을 전각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순조29년(1829) 광주유수 이지연이 세웠다.

 

 

온돌방

일장각의 방은 관료의 집무실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선비의 방을 재현하였다.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사군자중 하나인 매화도 병풍과 절제된 디자인의 가구들이 주를 이룬다.

 

 

 

                                   고지                    재판                 화로(수로)

 

대청

조선시대 선비가 생활하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도록 평상, 죽부인 등의 여름소품을 두어 그 모습을 재현하였다.

 

 

 

 

 


 

재덕당(在德堂)

재덕당은 상궐 내행전 뒤편 언덕에 있는 건물로 숙종14년(1688)에 유수 이세백이 정면 3칸, 측면 2.5칸의 규모로 건립하였다. 옆에는 반석(磐石)이라는 암각문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좌승당(左勝堂)

좌승당은 상궐 왼편 내곽 담장 밖에 있는 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다.

'좌승(左勝)'이란 '앉아서 이긴다'는 의미로 반드시 이길만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순조17년(1817) 광주 유수 심상규가 지은 이름이다. 건물의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고, 건물규모는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방과 마루로 되어 있다.

 


 

이위정(以威亭)

후원에 있는 이위정(以威亭)은 순조17년(1817년) 광주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하여 지은 정자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이위정에 관련된 기록은 '이위정기(以亭亭記)'가 탁본과 함께 <중정남한지>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 기문(記文)은 심상규가 짓고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가 썼다. 이때 심상규의 나이가 51세, 김정희의 나이 31세였다.

 

이위정기

일제 강점기때 행궁의 기능 상실과 함께 방치되면서 이위정기 편액 또한 행방을 알 수 없다.

불행 중 다행이도 탁본은 전해지고 있어 이를 토대로 2012년 다시 제작하였다.

 

내가 여기서 활쏘기를 하는 것은 호시(弧矢)를 일삼아 길이 힘쓰고자함이 아니라 성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의와 충용이 길이 날로 일어났으면 하는 큰 바람에서이니 어찌 천하를 위복(威服)하지 않겠는가 !

 


 

좌전(左殿)

좌전은 상궐 북쪽 담장 밖에 위치하며, 유사시 종묘의 신주(神主)를 옮겨 봉안하기 위해 만든 곳으로, 병자호란을 통하여 남한산성의 보장처로서 기능이 입증되자, 숙종37년(1711)에 부윤 김치룡이 우실과 함께 건립하였다. 좌전이라는 명칭은 건립 당시 별궁, 별전 등이 논의 되었지만 결국 봉안처가 행궁의 좌측에 위치하므로 좌(左)를 붙이되 예의 의미를 지닌 묘(廟)를 감추고, 전(殿)을 붙여 사용하게 되었다.

서울의 종묘와 같이 정전과 영녕전 2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사진의 왼쪽 건물이 영녕전이고 오른쪽 건물이 정전이다.

 

 

종묘

서울종묘의 정전(正殿)은 조선왕조 임금의 신위를 모신 건물로 영녕전(永寧殿)과 구분하여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한다. 정전은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며, 영녕전은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곳이다.

 

 

 

 

 

 

 

 


 

우실(右室)

우실은 왕실의 사직을 모시는 곳으로 숙종37년(1711) 좌전과 함께 건립하였다. 기록에는 원래 단(壇)만 있던 것을 4칸 건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사직단을 '우실'이라 이름한 것은 중국 주대(周代)이후 도성배치법에 있어서 '좌묘우사(左廟右祖) 전조후시(前朝後市)'의 기준을 따른 것인데, 왕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 앞에는 조정, 뒤에는 저자거리를 배치하는 예이다.

 

사직단

좌전과 우실은 남한산성행궁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들이다. 왕실에 위기가 닥쳐 피난할 때, 종묘에 있는 조상들의 신위를 모신 위패(신주)를 모시고 임시수도인 남한산성의 좌전에 위패를 옮겨 모시게 된다. 또한 사직단에 있는 왕실의 사직(토지의 신, 곡식의 신)을 모셔와 우실에 모시게 된다. 이를 위하여 좌전과 우실을 마련해 놓았다는 것을 보면 남한산성행궁이 일반적인 행궁이 아닌 임시수도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국가의 보장처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각(鐘閣)

20세기초까지 남한산성 중심에는 성문의 개폐와 비상상황을 알리는 종각이 있었으며, 현재도 종로거리라 불려지고 있다. 당시 종각에 설치된 종은 조선시대 4대 명종으로 이름난 국보 제 280호 성거산 천흥사 동종(聖居山 天興寺 銅鍾) 이다.고려시대 사찰인 천안의 천흥사가 폐한 후 남한산성 종으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창경원 박물관으로 이송 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남한산성 종은 '성거산 천흥사 동종'의 형태를 기본 모델로 하여 원형의 문양 및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되 크기는 300관에서 1000관(3.75톤)으로 크게 하여 종 울림이 좋게 하였다. 종각은 문헌을 토대로 고증을 통하여 6칸, 팔작지붕으로 건립되었다.

      

               

  용뉴                      비천                     당좌

 

<천흥사>명 천흥사 동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 1000년, 높이 187cm,, 국보 280호

 

고려시대의 동종을 대표할 수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그 양식에 있어서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부분적으로(용뉴의 모양, 위패의 명문곽) 변화를 준 현존하는 고려시대 중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큰 종이다.

 

 

 

 

 


 

인화관(人和館)

인조2년(1624)에 목사 유림이 건립하고 목사 이태연이 '인화(人和)'라는 편액을 걸었다. <중정남한지>의 기록에 '행전의 동쪽에 있는 객관이다.'라고 전한다. 인화관의 규모와 관련해서 <여지도서>에서는 객사 36칸이라 기록되어 있고, 2010년 발굴조사 결과 역시 36칸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1910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남한산성내 사진도 인화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이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인화관은 전패를 봉안하는 중앙의 정청과 파견된 관리의 유숙처인 동익헌, 서익헌 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객사

 

     

 

   고지도속 인화관                        망궐례

 

조선시대 객사는 정청에 전패를 봉안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 국왕에게 망궐례(望闕禮)하는 상징적인 장소이자, 국외 사신 및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의 유숙처로 중앙집권을 위하여 전국 읍치에 설치되었다.

● 전패(殿牌) - 임금을 상징하는 '전'자를 새겨 각 고을 객사에 세운 나무패

망궐례(望闕禮) - 궁궐이 멀리 있어 직접 궁궐에 나아가서 왕을 뵙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예

 


 

남한산성행궁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유적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전경

 

남한산성행궁 하궐 중건공사를 위하여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발굴조사중에 선대유물이 확인되었는데 기록에는 문무왕12년(672)에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하여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고, 주장성은 신라 최대 규모의 둘레 8Km 석축산성이라 하였다. 주장성이 바로 남한산성이다.

2007년 발굴조사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물지는 그 규모가 통일신라 시대 건물 중 최대 규모이며, 잘 다듬은 초석과 기단석이 사용되었고, 건물의  벽 두께가 2m, 기와 한장의 무게가 20 Kg (조선시대 기와의 무게는 약 4kg 정도이다)인 대형기와를 사용하였다. 발굴조사과정에서 수습한 숯으로 절대연대를 측정한 결과, 건물의 연대가 670-880년으로 추정되었으니 주장성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 건물지는 기초자료를 확보하고 다시 복토하여 땅속에 보존하고 그중 일부를 노출하여 전시하고 있다. 축적된 자료를 통하여 통일시날 건물추정도를 살펴보년 조선시대와는 다른 건물의 구조와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건물지에서 발굴된 대형기와

 

 

 

 

 

 

 

통일신라시대 대형기와와 조선시대 기와의 크기 비교

 

 

 

 

 

통일신라시대 대형기와와 조선시대 기와의 무게 비교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벽체와 초석

 

건물지 서편 기와저장소 전경

 

 

 

 

 

 

 

 

 

 

기와저장소 세부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보존전시

 

                       통일신라건물 가구도                 통일신라건물 복원도

 


 

남한산성 주요 연표

조선

1624년(인조2) 총융사 이서, 벽암각성이 남한산성을 축성. 인화관 건립

1625년(인조3) 남한산성행궁 건립, 연무관 건립

1626년(인조4) 남한산성 개축 완료, 수어청 설치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발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간 항전

1637년(인조15)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삼고두례)

1638년(인조16) 남한산성 원성을 증개축, 제2남옹성 수축

1639년(인조17) 남한산성에 사당을 세워 '백제 시조왕'이란 위판을 만들게 함. 숭렬전 건립

1654년(효종5) 하멜(Handrick Hamel), 청나라 칙사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남한산성에 머뭄

1672년(헌종13) 지수당 건립

1688년(숙종13) 여주 효종릉 참배길에 남한산성행차(2.26~30)

1689년(숙종14) 헌절사 건립, 재덕당 건립

1711년(숙종37) 좌전 및 우실 건립

1730년(영조6) 여주 효종를 참배길에 남한산성행차(2.25~29)

1751년(영조27) 유수 이기진 서장대(西將臺) 무망루(無忘樓)를 건립

1752년(영조28) 신남성 돈대를 쌓음

1756년(영조32) 남한의승 총 356명 경기 14명, 충청 28명, 강원 14명, 황해 4명,

                        전라 136명, 경상 160명이 거주하며 관리

1779년(정조3) 남한산성의 대대적인 수축, 정조 남한산성 행차

1795년(정조19) 경영을 없애고 남한산에 출진(出陳)하여

                        유수겸수어사(留守兼守禦使)라 라 칭함

1797~1798년(정조 21~22) 유수겸 수어사 홍억 산성 수선, 한남루(漢南樓) 건립

1804년(순조4) 유수 김재찬 지수당에 관어정(觀魚亭) 건립

1817년(순조17) 유수 심상규 좌승당(左勝堂), 이위정(以威亭), 옥천정(玉泉亭) 건립

1829년(순조29) 유수 이지연 일장각(日長閣) 건립

1846년(헌종12) 유수 홍경모 <중정 남한지(重訂 南韓誌)> 간행

1862년(철종13) 철종, 광주 태종릉(헌릉), 순조릉(인릉) 참배시 행차

1867년(고종4) 고종, 광주 태종릉(헌릉), 순조릉(인릉) 참배시 행차

1893년(고종29) 이폴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 남문, 한남루, 수어장대 촬영

1895년(고종31) 갑오개혁으로 광주부를 광주군으로 개편

 

대한제국

1900년(광무4) 광주부좌 남한산성 내 양전사업

1907년(융희1) 일제의 군대해산령으로 성안의 무기고와 화약고 파괴

1917년  광주군청이 산성 밖 경안으로 이전

1938년 조선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보존회 남한산성을 고적(古蹟)으로 지정

 

대한민국

1954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 남한산성 개원

1963년 남한산성 성곽을 중심으로 산성리 산 일원을 국가사적 제 57호로 지정

1971년 남한산성 경기도 도립공원으로 지정

1972년 수어장대를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 1호로, 숭열전을 제 2호로,

            청량당을 제 3호로, 헌절사를 제 4호로, 침괘정을 제 5호로,

            연무관을 제 6호로 각각 지정

2007년 남한산성행궁을 사적 제 480호로 지정

2010년 남한산성, UNESCO 세계유산 잠정목록(Tentative List) 등재, 남한산성행궁 준공

2011년 남한산성 종각 복원

2012년 남한산성행궁 개방

2014년 제 3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재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11개로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경주역사유적지구, 한국역사 마을(안동하회, 경주 양동),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 남한산성이다. 이들은 전 인류가 함께 보호, 보존하고 관리하여 후세에 물려줄 유적으로 세계유산위원회의 인정을 받았다.

 

 

남한산성의 가치 Outstanding Universal Value

세계유산을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바탕으로 한 등재기준 6가지중 한가지 이상이 부합해댜 한다. 남한산성은 다음 두 가지의 가치를 인정 받았다.

 

기준 ii) 남한산성은 동양의 도성조영론을 반영한 조선의 임시수도였다.

 

   ● 남한산성은 국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이다.

   ● 남한산성은 조선의 자주권과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유사시의 임시 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이다.

 

기준 iv) 남한산성의 군사시설은 성곽축성발달사의 보고이다.

   ● 남한산성은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 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를 잘 나타낸다.

 

완전성 Integrity

● 남한산성의 성곽 및 목재문화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현재까지 축성되고 관리되어

    온 문화재의 원형이 적절하게 잘 보존되어있다.

● 성곽을 둘러싼 지역은 모두 유산을 잘 보호할 수 있도록 완충구역으로 설정되었다.

 

● 남한산성의 문화재를 보존관리하고 다양한 활용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전세계 최초로 구성된 보존. 관리단일민간인전담기구이다.

 

 

진정성 Authenticity

남한산성은 자연 지세, 건축 구조, 도시계획적 측면에서 진정성 확보하고 특히 성곽과 산성 도시는 진정성의 측면에서 볼 때 충분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구성요소로 하고 있다.

 

● 형태와 디자인

 - 자연 지세를 따른 성벽은 거의 손상을 입지 않은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고 17세기

    축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무기체계의 발달에 따라 성곽 방어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어 시설이 증축되었다.

 

● 용도와 기능

- 남한산성은 전란을 대비하여 축성한 조선 왕실의 최후 보장처였으며, 현재까지 국방

   시스템에 중요한 군사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 남한산성 내 인구 4,000명이 거주하는 자급자족의 산성도시가 있었다.

 

● 전통, 기술, 관리체계

- 남한산성 성벽 축조술은 시대별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 남한산성은 10개의 승영사철을 두고 팔도도총섭과 의승방번제를 운영하여 승군이

   방어관리 하였다.

- 남한산성은 임시 행정 수도의 기능을 담담하여서 남한산성에 수어영의 본영을

   설치 하였다.

 

● 언어와 다른 형태의 비물질적 전통

- 남한산성은 종묘와 사직을 보전할 수 있는 왕실의 대피 장소였던 동시에

   일반 백성들이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이었다.

 

● 정신과 감성, 그리고 다른 외부와 내적 요인들

- 남한산성 역사적으로 외세에 대한 저항과 자주의식의 지주가 되었던 장소이다.

   남한산성은 저항의 상징이며, 승전의 장소보다 고통스런 역사를 통해 배운

   치욕스런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장소이다.

 

남한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인증서

 

 

 

 

 

 

 

 

 

 

 

 

 

 

 

 

 


 

남한산성 안내도

남한산성 탐방코스 Selected tour courses

1코스 산성로타리↔북문↔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산성로타리                     3.8 km 1:20

2코스 산성로타리↔영월정↔숭렬전↔수어장대↔서문↔국청사↔산성로터리               2.9Km 1:00

3코스 남한산성역사관↔현절사↔벌봉↔장경사↔망월사↔지수당↔남한산성역사관      5.7Km 2:00

4코스 산성로터리↔남문↔남장대터↔동문↔지수당↔개원사↔산성로터리                   3.8km 1:20

5코스 남산산성역사관↔동문↔동장대터↔북문↔서문↔수어장대↔영춘첮↔남문↔동문 7.7km 3:20


관람안내

관람시간         하절기 (4월-10월) 10:00-18:00

                     동절기(11월-3월): 10;00-17:00

                     휴궁일 : 매주 월요일

관람요금         어른 2,000원 (만 19세-만64세). 단체(30인) 1,600원

                     청소년 1,000원(만 7세-만 18세). 단체(30인) 800원

 

교통안내

시내버스         9번      야탑역 - 산성역 - 산성로터리 하차

                     52번    모란역 - 산성역 - 산성로터리 하차

                     15-1번 광지원리 - 산성로터리 하차

                     9-1번   산성역 - 산성로터리 하차

                     (주말. 공휴일만 운행)

지하철            5호선 마천역

                     1번출구 - 남한산덩등산로 - 서문(60분)

                     8호선 산성역

                     2번출구 - 시내버스 환승 - 산성로터리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