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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전. 영릉(英陵). 여주시(驪州市) 본문

나라안 나들이/경기도

세종전. 영릉(英陵). 여주시(驪州市)

세계속으로 2016. 3. 10. 15:27

세종전. 영릉(英陵). 여주시(驪州市). 경기도(京畿道)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네요.

 

 

 

조선왕조 계보와 왕릉

 

세종대왕 연표

1397년 (태조 6년, 1세)  4월 10일 (양력 5월 15일)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하다.

1408년(태종 8년, 12세) 충녕군에 책봉되고 심온의 딸(소헌왕후)과 혼인하다

1412년(태종 12년, 16세) 충녕대군에 진봉된다

1418년(태종 18년, 22세) 6월 왕세자로 책봉되다

1418년(태종 18년, 22세) 8월 10일 (양력 9월 18일) 조선 제 4대 임금으로 등극하다

1419년(세종 1년, 23세) 이종무가 227척의 병선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하다

1420년(세종 2년, 24세)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키다.

                                  집현전의 기구를 확장하여 궁중에 설치하다

1421년(세종 3년, 25세) 주자소에서 금속활자 <경자자>를 완성하여 인쇄술을 개량하다

1423년(세종 5년, 27세) 금속화폐 <조선통보>를 주조하다.

1424년(세종 6년, 28세) 사죄(死罪) 삼복법(三覆法:삼심제)을 정하여 죄인의 억울함을

                                  줄이다.

                                  불교의 종파을 선종, 교종, 양종 36사로 통합하다.

                                  악기도감을 설치하고 악기를 제조하다

1426년(세종 8년, 30세) 젊은 학자를 뽑아 사가독서(賜暇讀書: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하게 하다

1427년(세종 9년, 31세) <향약구급방>을 간행하고, 박연이 <편경>을 제작하다

1429년(세종 11년, 33세)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박연이 <편종>을 제작하다

1430년(세종 12년, 34세) 새로운 세법인 공법(貢法)의 실시 여부를 각도의 수령과 백성들

                                   에게 물어 찬반의 숫자를 조사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론조사)

                                   도량형의 기본 단위인 주척(周尺)을 바로 잡다

                                   관노비(官奴婢)의 출산휴가에 대한 법을 정하다

                                   아악보를 완성하다

1432년(세종 14년, 36세) <신찬팔도지리지>,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최윤덕 등이 압록강 이북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을 설치하여,

                                     국경을 이룩하다.

                                    <신찬경제속육전>을 편찬하고, <향약집성방>을 간행하다

                                    정초. 이천 등이 <혼천의>을 제작하다

1434년(세종 16년, 38세) 장영실이 제작한 <자격루>를 보루각에 설치하여 사용하다

                                   조판 주조의 법을 개량하고, 새 활자 <갑인자>를 만들다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다

1436년(세종 18년, 40세) 납활자 <병진자>를 만들다

1437년(세종 19년, 41세) <일성정시의>를 제작하다

                                   이천 등이 파저강 야인(여진족)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이 동북으로 두만강에 이르게 하다.

1438년(세종 20년, 42세) <신주무원록>을 편찬하다

1441년(세종 23년, 45세) 정인지 등에게 <치평요람>을 편찬하게 하다

                                    <측우기>를 제작하고, <수표>를 세우다

1443년(세종 25년, 47세)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언문청을 설치하다

1444년(세종 26년, 48세) 전제상정소에서 전분 6등, 연분 9등의 제도를 정하다

                                   <칠정산내. 외편>을 편찬하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화포를 개량하여 화포의 사정거리가 2배 이상 늘어나다

                                   <용비어천가>, <의방유취>를 편찬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소헌왕후가 승하하여 영릉 (서울 내곡동)에 장사하다

                                   훈민정음을 반포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완성하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치화평>,<취풍형>,<여민락>등의 악보를 완성하다

                                   <석보상절>을 간행하고, <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하다

                                   서울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을 개축하다

1448년(세종 30년, 52세)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건립하다

                                   <동국정운>을 간행하다

1449년(세종 31년, 53세) 두만강 유역의 6진을 모두 개척하다

1450년(세종 32년, 54세) 2월 17일 (양력 4월 8일) 영응대군 집 동쪽별궁에서 승하하시어,

                                   소헌왕후가 안장된 영릉(서울 내곡동) 서실에 합장하다

1469년(예종 1년)           영릉을 서울 내곡동에서 현재의 위치에 천장하다.

 

세종대왕의 업적

한글창제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우리글인 한글을 창제한 것으로 1443년(세종 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 창제하고 3년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연후인 1446년에 이를 반포하였다.

한글은 그 원리나 형태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익히기 쉽고 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로 평가되고 있다.

한글 창제의 더 큰 의의는 당시 한문을 무조건 숭상하고 중국을 섬기기에 급급했던 많은 사대주의 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를 무릅쓰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위하여 온 정성과 슬기를 다해 우리의 글을 만들어 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학문의 진흥과 제도의 정비

세종대왕은 왕실 연구기관인 집현전을 확대. 개편하여 우수한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옛 제도를 연구하도록 함으로써 정치. 법률, 역사, 유교, 어학, 천문, 지리, 의학, 농업 등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1420년에 경자자, 1434년에 갑인자, 1436년에 병진자 등 활자를 만들어, 친히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고려사, 삼강행실도, 팔도지리지, 석보상절, 의방유취 등 귀중한 서적들을 간행하였으며,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이개, 하위지, 박팽년, 최항 등 많은 학자들이 이 사업데 참여했다. 정치와 사회제도의 정비에도 힘써 전제(田制)와 세제(稅制)를 정비하였으며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크게 장려하였다. 죄인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삼심제도를 택하였고 관노비의 출산휴가제를 도입하였다.

또한, 유교의 장려와 더불어 불교의 발달에도 힘쓰는 등 내치에 있어서도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과학의 발전

세종대왕은 거의 한평생을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발명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하여 천문관측기구인 대.소간의, 천체측정기구인 혼천의 등을 만들어 천체를 관측하게 하였으며,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어 시간을 재도록 하였다.

1441년에는 왕이 친히 고안하여 구리로 측우기를 제작케 하고, 다음해부터 사상 처음으로 서울과 지방에서 강우량을 측정토록 하였으며, 수표를 만들어 하천의 수위를 재게 하고 외국의 역법을 참작하여 역서와 천문도를 제작했다.

이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당시 주업이었던 농업을 진흥시켜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었다.

 

음악의 정리

세종대왕은 음악에 정통하여 스스로 많은 가곡을 짓기도 하였으며 제사음악을 제정하고 새로운 악보법을 창안하는 등 음악의 정비와 그 발전에 크게 힘을 기울였다.

세종대왕 때의 음악 정리사업은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창작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박연으로 하여금 모든 악기를 조사 연구토록 하여 각종 악기를 새로 만들고 특히 편경과 편종을 새로 제작하였다. 또한 악곡. 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고 이를 바로 잡아 새로 재정함으로써 아악의 기초를 확립하는 한편, 궁중의 조회에 속악과 함께 처음으로 병용하도록 했다.

 

국토의 확장

세종대왕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고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 6진과 4군을 설치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1419년 빈번히 바다를 건너와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를 응징하기 위해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1433년에는 최윤덕으로 하여금 평안도 지방의 야인(여진족)을 평정하게 하여 4군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 지방에 6진을 개척하여 백성을 이주시켰다. 이로써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나라의 국경이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