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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탈출...

다산기념관. 남양주시(南楊州市) 본문

나라안 나들이/경기도

다산기념관. 남양주시(南楊州市)

세계속으로 2018. 7. 12. 15:50

다산기념관. 남양주시(南楊州市). 경기도(京畿道)






   

"가을비 내리는 역사에서 사람 보내기 쉽지 않네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찾아올 이 또 뉘 있을까.

자네가 벼슬길 오르는 것이 부럽기만 한데 이릉 신세 이 몸에겐 돌아갈 날 기약 없네

유사에서 시 짓던 날 잊을 수 없고 임금님 떠나신 경신년 슬픔 말로 못하겠네.

대나무 몇 그루 서걱거릴 다른 날 밤엔 머리 돌려 고향 보며 눈물이나 흘리겠지."

 

送別(송별) - 丁若鏞(정약용)



다산 정약용, 조선의 과학기술을 일으키다.

정약용 선생은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였다. 정약용 선생은 수원 화성을 축조할때, 무거운 돌을 들기 위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여 활용하였다. 이를 통해 공사기간을 3년여 정도 단축하였고, 40,000냥 정도를 절약하였다고 한다. 이 거중기는 움직 도르래와 고정 도르래 여러 개를 결합하여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이른바 복합 도르래 형태로 제작되었다. 거중기는 위쪽에 고정 도르래와 아래 움직 도르래가 각각 4개로 구성되어 있다. 정약용 선생은 <기중도설>에서 거중기로 한 사람이 400근(약 240Kg)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다고 밝혔다.












조선왕조 오백년사 최대의 천재적 지식인

다산 정약용 연대기

1762. 06. 16 (1세)

- 초부면 마현리에서 넷째아들로 태어남.


1776 (15세)

- 홍화보의 딸과 혼인함. (02.22)

- 아버지 정재원이 다시 벼슬길에 올라 한성으로 이사함.

- 이익의 성호사설을 읽고 실학에 뜻을 둠.


1783 (22세)

-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됨


1784 (23세)

- 정조에게 중용을 강론함.


1789 (28세)

-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름.


1790 (29세)

- 나라에서 금지하는 서학을 공부 하였다고 하여 충청도 해미로 귀양 갔다가 곧 풀려남.


1792 (31세)

- 홍문관 수찬이 됨

- 수원 화성을 쌓는 일을 연구하여 수원성제를 지음.


1794 (33세)

-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연천지방을 돌아봄.


1797 (36세)

- 황해도 곡산도호부사가 되어 어진 정치를 베풂.

- 천연두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해 <마과회통>을 지음.


1801 (40세)

- 신유사옥 때 경상도로 장기(포항) 귀양함. (02.27)

- 황사영 백서 사건에 관련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감. (11. 05)


1808 (47세)

- 다산에 있는 정자로 옮겨 다산이라는 호를 쓰고 책을 쓰기 시작함.


1817 (56세)

- <경세유표> 40권을 완성함.


1818 (57세)

- <목민심서> 48권을 완성함.

- 귀양에서 17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옴.


1819 (58세)

- <흠흠신서> 30권을 완성함.


1836 (75세)

- 세상을 떠남.


아들이자 아버지, 스승과 제자

정약용의 가계, 학통


18년의 고독, 다산 정약용의 유배

정약용 유배의 길



유배인 정약용

정약용이 머문 곳

보은산방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5년 겨울부터 1806년 가을까지 머물며 <만덕사지>, <대동산교고>등을 찬술 한 곳이다.


사의재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1년 겨울부터 1805년까지 머물며 <아학편훈의>, <제경>등을 찬술 한 곳이다.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11년 동안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등을 저술했다.


유배인 정약용, 그의 다산학

유배길 정약용 업적

경세유표 (1817)

경세(經世)란 낡은 제도를 새롭게 해서 나라를 운영한다는 뜻이며, 유표(遺表)란 늙은 신하가 임금에게 유언처럼 남기면서 올리는 글이다. 이 책은 <주례(周禮)>의 이념을 바탕으로 조선의 현실을 새롭게 개혁하기 위해 저술한 국가개혁론으로 관직체계의 전면 개편, 신분과 지역 차별 없이 골고루 인재 등용, 토지제도 개혁, 조세제도, 지방 행정조직 재편 등 당시 사화기 가지고 있는 문제점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목민심서 (1818)

수령으로써 수행해야 할 일들을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등 육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전체 12부 중에서 앞뒤로 부임과 해임에 관한 2개 부와 수령의 몸가짐에 관한 4개부가 있어 지방관의 자세와 역할 등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당시 현행법을 전제로 하는 행정의 개혁방안이다.


흠흠신서 (1819)

흠흠(欽欽)이란 중국의 서경에 나오는 글로 죄인을 다스리는데 있어 신중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형법에 관한 개혁서이다. 관리들이 법률에 밝지 못하고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 할 능력이 부족하여 형사사건을 올바르게 판결하지 못하는 걸 보고 중국과 조선의 살인사건에 관한 판례집과 문서작성, 문장기법 등 형법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저술하고 있다.




글씨로 읽는 정약용



정약용, 민족의 스승 마현에서 태어나다.

다산 정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