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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교(月精橋) 야경. 경주시(慶州市) 본문

나라안 나들이/경상북도

월정교(月精橋) 야경. 경주시(慶州市)

세계속으로 2019. 1. 13. 18:41

월정교(月精橋) 야경. 경주시(慶州市). 경북(慶北)


월정교(月精橋)


월정교(月精橋)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19년(760) "궁궐 남쪽 문천(蚊川)위에 월정교, 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현장에 배 모양의 교각만 전해지고 있었으나 오랜 고증을 통해 누교(樓橋)를 복원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월정교는 길이가 60.57m 이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와 기와가 출토되어 교각 위쪽이 누각(樓閣)과 지붕으로 연결된 누교였을 것으로 확인되었다.

동쪽 약 700m 상류에 센 물살에 견딜 수 있도록 배 모양의 교각 뿐만 아니라, 다리의 규모와 축조방법, 석재의 색깔, 재질까지도 유사한 춘양교가 위치하고 있다.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요석공주(瑤石公主)의 사랑 이야기가 얽힌 유교(楡橋)의 흔적도 월정교 19m 하류에 보존되어 있다. 월정교는 신라의 문화적 수준과 교량의 축조기술, 의장, 교통로 등 신라왕경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통일신라의 문화적 품격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남천 위에 세워진 누각 다리(蚊川 樓橋)' 월정교는 주야로 단청누교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월정교는 형산강팔경(2016)으로 선정되었고 월정교와 춘양교지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제457호)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원효대사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

원효대사(617년 ~ 686년)

원효(원효, 617~686)대사는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속성은 설씨, 법명은 원효, 시호는 화쟁국사(화쟁국사), 초명은 서당(서당)이다. 신라 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현재 경북 경산시)에서 태어났으며 설총의 아버지이다. 젊은 시절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수학하고자 요동까지 갔지만, 고구려군에게 첩자로 몰려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십년후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기 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던 도중 하룻밤을 지내게 된 토굴에서 갈증이 나 토굴 속에서 고여 있는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묘지였고 물을 마셨던 그릇은 바로 해골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오(大悟)한 원효대사는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대오한 후 원효대사는 미친 사람이나 거지 행세를 하면서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 포교에 들어갔다. 이후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薛聰)을 낳았고 그 후 파계(破戒)하였다. 파계한 후 속복(俗服)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천촌만락(川村萬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원효대사가 교화한 사상으로는 인간의 원래 본성인 일심(一心)으로 돌아가자는 일심사상(一心思想), 모두가 실제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하나로 만난다는 화쟁사상(和諍思想),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무애사상(無碍思想)이 대표적이다. 말년에는 왕궁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강의하였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찬술하였다. 분황사(芬皇寺)에서 <화엄경(華嚴經)>, <사십회향품소(四十廻向品疎)>를 지었다.

원효대사는 신라 신문왕 6년 70세의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 아들 설총이 원효대사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모시고 추모하였다.


유교(楡橋)

원효대사가 어느 날 거리를 누비며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 誰許沒柯斧我斫支天柱(수허몰가부아작지천주)라며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는데 태종 무열왕이 그 노래의 의미를 알고 말했다. '아마도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위대한 인물이 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

그 당시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요석공주가 있었는데 왕은 궁리를 시켜 원효대사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원효대사는 궁리를 보자 일부러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적시었다. 궁리는 원효대사를 요석궁으로 안내하여 옷을 말리게 하니 그곳에 원효대사가 머물게 되었다. 이 인연으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는 사랑을 하였고 신라 십현중의 한 분인 설총을 낳았다.

원효대사가 떨어진 다리는 <삼국유사>에 유고(楡橋)라는 이름이 전하는데 1984년 월정교지 발굴조사시 월정교지 바로 아래에서 확인된 나무다리터로 추정된다. 요석궁은 지금의 향교자리에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