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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전 회의실. 앙부와즈 성(Chateau de Ambois). 르와르(Loire) 본문

서유럽/프랑스 (France)

어전 회의실. 앙부와즈 성(Chateau de Ambois). 르와르(Loire)

세계속으로 2014. 8. 14. 17:06

어전 회의실. 앙부와즈 성(Chateau de Ambois).

르와르(Loire). 프랑스(France)

 

어전 회의실

르네상스 시대에, 프랑스의 왕은 각 지방의 지방 귀족들, 장교들 그리고 카톨릭 종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왕에 대한 충성심을 확보하면서 왕권을 점차 강화해나가는 정책을 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 각 지방 대 귀족들의 부인들을 동반하여 몇 달씩이나 그의 성에 머물게 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여인들이 궁중 생활에 등장하게 된다. 장엄한 공식 접견과 연희들은 궁중생활의 필수적인 즐거운 행사중에 하나가 되었다. 어전 회의실은 이 궁전 축제에 적합한 가장 큰 규모의 방이었다.

 

 

왼쪽에서 부터 오른쪽 :

● 첫번째 벽난로는 기후가 나쁜 계절에 아늑한 난방을 보장하였다. 이 벽난로의 굴뚝은

    형태가 사다리 모양이고 고딕 양식의 전통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굴뚝면의 장식 : 샤를 8세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장식의 화려한 검.

● 중앙 기둥 : 프랑스 왕가의 상징 백합꽃과 브러탄녀 공국의 상징인 흰담비의 얼룩 무늬

    장식.

● 백합 무늬의 천개가 덮힌 왕좌 (왼편 강쪽으로)

● 천정 : 샤를 8세(알파벳 C가 얽힌)와 안느 드 브러탄너 (알파벳 A)의 모노그램

● 두번째 벽난로 (방의 다른 끝에 있는)는 르네상스 양식을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다. 

● 중간 오른쪽으로, 바깥 현수 갤러리 (지금은 없어짐)를 통해 다른 방들과 그리고

    회전 계단과 연결되는 나무 문.

● 큰 등받이의 긴 벤치 의자, 등받이에는 전형적인 고딕 스타일의 주름 잡힌 천 장식.

● 입구 오른쪽 위로 나무 조각판화 : 프랑수와 1세의 상징인 도룡뇽.

 

프랑수와 1세 (1494/♕1515/ †1547)

프랑스 르네상스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

루이 12세는 사촌이면서 미래의 왕위 계승권자인 프랑스와 당굴렘을 앙부와즈 성에 오게 한다. 프랑수와 당굴렘은 4세의 나이로 어머니 루이즈 드 사부와 와 누이 마그리뜨와 같이 앙부와즈에 도착한다.

1515년 왕좌에 오를 때까지 어린 시절을 이 성에서 보내게 된다.

르네상스에 심취한 그는 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왕 자신이 프랑스의 학식가들인 뷔데(Bude), 마로(Marot), 뒤 블레(du Bellay), 롱사르(Ronsard)와 라블레(Rabelais)등의 후원자가 되며, 이탈리아의 예술가들 : 앙드레아 델 샤르토(Andrea del Sarto),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등이 측근에서 일하도록 배려해 준다. 프랑수와 1세는 또한 앙부와즈의 본궁의 르네상스 별관을 높이 올리는 공사를 지시하였으며 이탈리아식 천창 장식을 도입하도록 하였다.

 

장래 프랑수와 1세가 되는 프랑수와 당굴렘의 젊은 시절 초상화

 

 

이동하는 왕정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왕은 일년 내내 성에 머물지 않았었다. 왕들의 통치기간의 대부분이 전쟁에 참전이나 또는 왕국의 여러 지방을 돌아보는데 시간을 보냈었는데 이 성에는 다시 출발하기 위해 몇 주간 쉬어가는 데 사용되었었다.

프랑수와 1세는 많은 정치적 원정을 수행했는데 여러 도시들 입성을 의식화하였고, 특사를 베풀거나 행정 처리 그리고 지방 정치를 감독하였다. 그의 통치기간 11,778일 중 여행 일수는 8,000일에 달한다. 왕이 이동을 하면 모든 수행원들이 동반했다. 수행원들은 왕의 고관들, 왕비의 측근 뿐만 아니라 왕정의 추종자들도 포함되었었다.

프랑수와 1세의 아들 앙리 2세의 통치때에는 왕 이동시 수행원의 숫자가 10,000명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프랑수와 1세 왕

1527년경 프랑수와 끌루에 작품

 

포스터 사건 ....

앙부와즈 모의, 종교 전쟁의 시발점

볼로냐 정교 협약(Concorrrrrdat de BBBogne)(1516)에 서명하여 프랑수와 1세는 교회에 대한 왕권의 권위를 확보한다. 그는 교회 개혁에 호의적이기는 하였지만, 신학적 논쟁에 대해서는 거리르 두고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있을 수 없는 교황의 미사 집전 남용>에 항의하는 포스터가 왕국의 큰 도시들에 그리고 또 앙부와즈 성의 왕 침실문에 1534년 10월 17일에서 18일밤 사이에 붙여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왕이 관용하던 교회 개혁이 모두 중단되었다. 200명에서 300명 정도가 체포되었다. 그 이후 몇달 동안 이단자라고 간두된 수십명이 살린 채 불태우는 화형으로 처벌되었다.

1560년, 16세의 나이로 새로 즉위한 프랑수와 2세는 앙리 2세와 까트린느 드 메디치 왕비 사이의 맏 아들이었다. 즉위 일 년전 그는 스코틀랜드 여왕 마리 스튜아르와 결혼하였다. 기이즈 가문의 마리 스튜아르의 삼촌들이 실제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신교도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지지하여다. 신교도들은 프랑수와 2세를 기이즈 가문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1560년 3월 27일과 29일 프랑수와 2세를 앙부와즈 성으로 납치하는 거사를 시도하였다. 이 음모자들은 결국 체포되어 대중들 앞에서 처형되었다.

음모자 몇명은 <본보기를 위해> 성의 발코니에 매달아 처형하였다. 무기로 대응한 이 두 파의 대결은 1572년 8월 24일 유명 성 바르텔레미 학살 사건으로 그 정점을 이룬다.

 

앙부와즈 음모를 주제로 한 판화(1560)

 

프랑스 왕비.

마리 스튜아르의 초상화(1542-1587)

 

프랑수와 2세의 초상화(1544/D1559/†1560)

- 안내문에서 -

 

 

 

 

 

 

 

 

 

 

 

 

 

 

백합 무늬의 천개가 덮힌 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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